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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 Mash up

시간과 기계 그리고 공간과 인간 - 24

by Azzurro 2020. 10. 19.

시간을 장악할 수 있었다면,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세우고, 진시황릉을 남겼을까? 진시황은 불로장생을 원했다. 그러니까, 그는 죽고 싶지 않았다. 죽음은 시간의 문제다. 하지만 시간은 손아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소위 권력을 가진 인간은 공간을 차지하면서 정복감을 느끼고자 한다. 내 이름이 새겨진 땅을 더 넓히고, 나를 우러를 공간을 높게 높게 쌓아 올린다. 만리장성이나 황릉은 그런 의미에서 시간을 정복하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던 좌절의 전리품일지도 모르겠다.

‘창조’ 뜻을 지닌 크리에이트(create)의 어원은 라틴어 ‘creare’에서 기원했다. 창조라는 단어는 신만이 사용할 수 있다. 무에서 유를 만드는 것은 신밖에 없다. 때로 우리는 미지의 영역을 신의 근거로 삼기도 한다. 맹신론자들에게 신의 존재를 입증하라 하면 대부분 태초의 신비를 가리킨다. 우주가 어떻게 기원했고, 만들어졌는지 과학적으로 완벽히 입증할 수 없기에 그게 곧 신의 지문이라고 말이다. 실상 이는 무지의 몫을 신에게 떠넘기던 전근대적 사고방식의 틀과 다를 바 없다.

과학의 시대라고 해서 다 알 수는 없다. 여러 가설은 종종 역설과 만나고 완벽한 이론도 실현 앞에선 무릎을 꿇기 일쑤다. 크리스토퍼 놀런의 영화 <테넷>이 기반하고 있는 엔트로피 이론만 해도 그렇다. 이론적으로는 완벽하고 매혹적이지만 체험으로 납득하기는 어렵다. 무질서도와 질서, 상대성 이론은 매우 고난도의 학문 영역이라 일반인이 이해하기조차 어렵다.

성직자가 미지의 영역을 신의 근거로 삼고, 과학자가 그것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놀런은 그것을 영화로 풀어낸다. 늘 놀런의 영화가 놀라운 건 과학의 가설을 삶 전반에 대한 통찰로 끌고 들어가서다. <테넷>은 지금껏 놀런이 영화적으로 탐구해온 주제들을 종합한 작품이다. 시간의 상대성과 기억의 주관성, 영화를 통한 마술적 재현과 편집 위에 가능한 시간의 교차까지. 첫 작품 <미행>부터 근작 <던케르크>에 이르기까지 그가 좇아왔던 주제들이 모두 녹아 있는 작품인 셈이다.

그 주제들 중에서도 유독 눈길을 끄는 것은 크리스토퍼 놀런 식의 도덕이다. 과학의 언어가 법칙이고 종교의 언어가 율법이라면 도덕은 그 가운데에서 구제받지 못한 인간들의 합의이다. 도덕은 타인에게 고통을 줄 만한 일은 하지 않는 서로의 공감과 약속에서 출발한다. 타인의 불행이 나의 고통이므로 우리는 서로 고통받지 않기 위해 윤리와 도덕을 세우고 지켜나가는 것이다. 이런 주제를 잘 보여주는 대사가 바로 “일어난 일은 일어난다”이다. 이 대사는 테드 창의 소설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에 먼저 등장했다. 소설엔 ‘세월의 문’이라 불리는 시간 여행의 통로가 등장한다. 과거의 잘못을 되짚기 위해 세월의 문을 통과하려 하자, 한 인물이 말한다. “일어난 일을 결코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테넷>의 악역 역시 이 명제를 알고 있었던 듯싶다. 세상을 파괴하고자 하는 악당은 그렇게 함으로써 신이 되고자 한다. 그러나 그 역시도 자신에게 다가올 죽음이라는 ‘일’이 결코 되돌릴 수 없는 것임은 알고 있다.

다시 진시황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면 그 역시 죽음의 필연성을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에일리언> 시리즈의 프리퀄인 <프로메테우스>의 주인공 역시 불로와 불사의 비밀을 알기 위해 멀고 먼 우주로 떠난다. 그러나 인간은 공간을 점유할 수 있을 뿐 시간을 정복할 수는 없다. 우린 프로메테우스의 거부나 <테넷>의 사토르처럼 대단한 돈이나 권력을 갖지 못했으니 우주 여행이나 세상 끝까지의 여행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 그러나 내가 가질 수 있는 한 최대한 많은 공간을 차지하고, 최선을 다해 높이 쌓고자 한다는 점에서 우리도 그들과 다르지 않다. 시간의 연장은 철학자 레비나스의 말처럼 다음 세대를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아무리 이 땅 위에 많은 것을 새긴다할지언정, 그럴수록 우린 폭군에 더 가까워질 뿐이다. 아이를 살리는 것, 크리스토퍼 놀런이 거듭 주장하는 이 도덕에 고개가 끄덕여질 수밖에 없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