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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 Mash up

시간과 기계 그리고 공간과 인간 - 23

by Azzurro 2018. 9. 4.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권력자들이 그렇게 사람들의 시간을

포섭할 때, 서서히 세상은 미쳐 돌아간다.


*비빔 박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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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단일한 역사, 즉자대자적인 역사, 혹은 목적론적 역사를 비판하고 기각하는 것으로 근대적 역사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거대한 총체적 역사를 미시적인 파편적 역사로 대체한다고 근대적 역사 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역사가 하나의 이야기고 서사인 한, 이야기 전체를 끌고 가는 목적 내지 종결의 관념을 역사적 서술 전체에서 완전히 떨어뜨릴 수 있을까?
하나의 역사를 복수의 역사로 대체함으로써 이런저런 이야기가 모두 가능하다는 식의 자유주의나 상대주의로 나아가는 것은 아닐까?

여기서 무엇보다 먼저 주의할 것은 역사 개념은 항상 -이미 특정한 종류의 시간 개념이기에 그것이 전제하고 있는 시간 개념 자체와 대결하지 않고선 역사의 개념 자체를 변환시키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직선적이고 양적이며 누적 가능한, 동시에 사건들의 좌표적 척도로서 기능하는 시계적 시간 개념, 이것을 넘어서지 못하는 한 역사 개념은 다시 근대적 역사관념 주변으로 회귀하게 될 것이다.

굳이 베르그손이나 하이데거를 인용할 것도 없이, 시간이란 자연과 학자들이 t라고 표시하는 양적인 무정의 개념이 아니며, 사건과 무관한 초월적 척도도 아니다. 따라서 그것은 모든 사건들은 포괄할 수 있는 절대적 좌표계를 뜻하지도 않는다.

​​시간이란 간단히 말하면 어떤 요소들이 동조하여 하나의 집합적 리듬을 만들어낼 때, 그 리듬과 더불어 탄생하는 것이다.

즉 시간은 사건이나 사물과 무관하게, 그것들에 항상 선행하여 존재하는 어떤 조건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이나 신체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공시화됨에 따라 만들어지는 구성물이다. 따라서 그것은 어떤 요소들이 모여 어떤 신체를 구성하는지, 어떤 리듬으로 공시화되는지에 따라 다른 속도를 갖는 다른 시간이 만들어진다.

가령 타이의 맹그로브 숲에서 동시에 리듬을 맞추어 반짝이는 반딧불이는 그들의 공시화된 리듬을 통해 반딧불이 전체를 포괄하는 하나의 집합적 신체를 구성한다. 이때 주변의 다른 것들과 구별되는 하나의 시간이 이 집합적 신체를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우리 몸의 약 100조 개에 이르는 세포들은 하나의 리듬에 동조됨에 따라 하나의 신체를 구성하는 것이며, 그런 한에서 하나의 생체적 시간을 갖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안에서 기관들마다 다른 리듬을 갖고 다른 속도로 움직이지만, 그 기관들 전체의 움직임은 신체 전체 안에서 동조된 단일한 리듬을 갖는다. 이 경우 다른 속도, 다른 양상으로 움직이는 심장과 위장이 하나의 신체를 구성한다고 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로, 하나의 시간 속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농부의 시간은 해와 달의 움직임과 맞추어 변화하는 계절의 리듬에 동조되어 있고, 이런 의미에서 그것들의 리듬에 따라 움직인다. 그들의 시간이 자연의 계절적 시간이라고 말하는 것은 정확하게 이런 의미에서다. 하나의 공동체를 구성하는 생태계나 사람들의 오래된 공동체를 역시 하나의 집합적 리듬을 공유하는 한 하나의 공통된 시간을 갖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이처럼 복수의 요소들은 모여서 하나의 리듬을 통해 동조되어 움직일 때, 그 복수의 요소들은 하나의 리듬을 갖고 동조되어 작동하는 이러한 개체화의 결과다. 개체란, 분할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분할 가능한 것들의 복수적 집합체란 의미에서, 무리지어-사는-것이란 의미에서 항상-이미 중-생이다. 개체란 항상-이미 집합체인 것이다. ​이 집합체를 하나의 개체로 존재하고 작동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바로 ‘리듬’이다.

시간이란 복수의 요소들이 하나의 개체로서 공동으로 움직일 수 있게 해주는 이 리듬이 어떤 비평형적 항상성을 갖게 되었을 때 ‘존재한
다’고 말할 수 있다.


흔히 ‘주체’라고 부르는 것은 이러한 복수의 요소들의 이러한 시간적 종합에 의해, 신체적 공조에 의해 탄생한다.

요컨대 세상에는 하나의 시간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많은 복수의 시간들이 존재한다.
나와 다른 리듬을 갖는 사람이나 생물들의 신체, 나와 다른 리듬으로 일하는 사람들의 신체는 다른 시간을 갖고 다른 속도로 움직인다. 동시에 의식하지도 못한 채 동일한 리듬으로 움직이는, 동일한 시간을 공유하는 신체들의 집합 역시 존재한다.

그런데 시간은 신체들의 상호적인 동조에 따르지만, 일방적이고 강제적인 동조 또한 그에 못지 않게 하나의 시간을 구성한다. 가령 기계의
움직임은 노동자의 신체의 리듬과 아주 다른 리듬을 갖고 있지만, 노동자가 기계의 움직임에 따르는 한 양자는 함께 하나의 신체를 구성하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그들을 관통하며 하나의 시간이 흐른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결정적 중요성을 갖는 것은 개체화마다 다르게 구성되는 리듬과 달리, 모든 리듬을 하나의 동일한 것으로 맞추게 하기 위한 시계적 시간이라는 척도적 시간의 도입이다. 시계를 척도로 한 시간적인 동조의 요구, 그리고 시간적인 통제와 훈육은 상이한 리듬의 신체를 하나의 동일한 것으로 통합한다.

시계는 우리의 신체적 리듬과 무관한 리듬을 갖지만, 우리가 강제나 훈육에 의해서 시계의 리듬에 우리 자신의 행동과 사고를 동조시키게 된다면 우리는 시계적 시간을 통해 그것에 동조된 다른 신체들과 동조하여 하나의 공통된 시간을 구성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동조는 잘 알다시피 여러 종류의 처벌을 수반하는 강한 훈육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는 멀리는 중세 도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에도 파업을 하거나 대투쟁이 벌어질 때면 노동자들이 제일 먼저 달려가서 부수는 것이 작업시간을 알리는 종이었는데, 그래서 이 종을 부순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규정이 각 도시마다 있었다고 한다.

시계적 시간에 노동자들을 동조하게 하기 위한 부르주아들의 집요한 노력은 ‘공장’이라는 장치의 출현과 더불어 시작되었지만, 이것이 본격화된 것은 산업혁명기였다. 산업혁명은 새로운 종류의 기계를 통해 노동의 흐름을 장악하려고 한 시도였고, 이로써 노동의 리듬을 부루주아가 장악하려는 계급투쟁이었다. 이는 이후 더욱 집요하고 강박적인 방식으로 진행된다. 노동자의 미시적인 동작 하나하나까지 자본가가 장악하고자 했던 테일러주의가 그것이다. 농촌에서 올라온 노동자들을 공장의 시계적이고 기계적인 시간에 맞처어내고자 했던 다양한 종류의 시간 규율, 학생들의 일상을 시계와 시간표에 맞추어내려는 시도는 신체적 리듬을 장악하려는 부르주아적 시도의 연장선상에 있다.

무엇인가를 완전히 장악한다는 것은 그것의 리듬을 장악하는 것이고, 자신의 시간 속에 포섭하는 것을 뜻한다.

이처럼 다른 시간, 다른 리듬의 신체를 포섭하여 하나의 시간 속에 통합하려는 힘과 권력 또한 존재한다.

따라서 적대관계 속에서 작동하는 자본주의에서 자본가의 계급투쟁이 가장 먼저 시간을 겨냥하여 진행되었다는 것은 아주 시사적인 것이다.

*이진경, ‘역사적인 공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