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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 Mash up

시간과 기계 그리고 공간과 인간 - 22

by Azzurro 2018. 8. 14.



​​시계-시간을 깨고

지금 숨쉬고 있는 여기와 감응하라.



시간-기계를 깨고

시간을 통제하여 인간 개개인을 기계로 종속시키려는 무리들을

찾아내고 싸워야 한다.


인간-공간

인간은 공간이며 공간은 인간의 존재를 증명한다.

지금-여기 내가 숨쉬고 있는 것에 집중하라!


오랫동안 켜켜이 포섭된 그들의 시계-시간 세뇌전술에

혹시 포섭되었다면 먼저 깨어난 자들이 그들을 깨우는 작업을

결코 멈추지 말아야 한다. 

멈추는 순간 물거품이 되고 만다.


시계-시간 유리벽에 작은 균열이라도 내고 말겠다는 송곳같은 마음으로

모두 함께 다시!


*세콘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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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라는 것을 통해서 시간은 순환적인 것에서 직선적인

것으로 바뀐다. 이때 역사가 단지 과거에 일어난 일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정치나 권력과 긴밀히

결부된, ‘계열화된’사건들의 집합이다. 그런 만큼 계열적인

통일성을 구성하기 위해선 ‘필요한’사건을 애써 찾아내기도 하고,

반대로 그 계열의 통일성을 교란하는 사건은 배제하기도 하는

방식으로 구성되고 만들어지는 것이 역사다. 그래서 예컨대

김부식은 자신이 쓴 역사책을 위하여 그 이전의 모든 역사책들을

다 불태워 버리지 않았던가? 역사가 국가로부터 ‘독립’했다고 보이는

최근의 시기에도 적어도 공식적인 성격의 ‘역사’는 권력의 정통성을

입증하면서, 그것을 축으로 특정한 사건들을 선별하여 포섭하거나

배제하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요컨대 역사란 정착민의 삶이 제국 내지 국가의 형태를 취하며, 그것을

통해 일련의 사건들이 모여 ‘문화’내지 ‘문명’이라는 것을 만듦으로써

구성되는 것이다. 이때 문명이나 문화라는 것은 성과의 축적이요, 지나간

시간의 누적을 뜻하는 것이다. 그렇게 누적된 시간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된다. 예를 들면 대륙의 중앙을 정복한 사건, 황제로 등극한 시점은 결코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황제는 자신의 권력을 무로 되돌리는 순화적 시간을

결코 허용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제 그들은 그 시간을 불가역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한다. 연대기적인 기록으로서 역사,

혹은 중국식의 편년체 역사는 시간의 방향성을 하나로 고정함으로써, 그리고

그것을 누적되고 축적되는 것으로 만듦으로써 현존하는 권력과 문명을 필경

무로 돌리고 말 순환적 시간과 싸우는 일종의 보호막인 셈이다. 드보르는 말한다.


연대기는 권력의 불가역적 시간의 표현이자, 시간의 임의적 진행으로부터

선행했던 것을 보호하는 도구다. 왜냐하면 시간의 이런 불가역적 방향은

모든 특수한 권력의 몰락과 더불어 붕괴하고 그런 뒤에는 순환적 시간의

무심한 망각으로 돌아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의 시간은 순환성을 깨는 직선적 시간의 형식을 취한다.

역사의 소유자들은 시간에게 하나의 의미(sense; ‘방향’이란 뜻도 있음),

즉 일정한 의의를 지니는 하나의 방향성을 부여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역사의 시간이란 역사를 소유한 자들의 시간이고, 그렇지 못한 자들의

삶의 리듬을 소유한 자들에 일치시키려는 그러한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제국의 시간’이요, ‘권력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로마든, 중국이든 제국이 성립한 곳에선 어디서나 역을

정리하고, 시간에 황제의 이름을 부여하려고 한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제국의 황제 이외에 독자적인 역의 사용은 금지되었다. 뿐만 아니라 국가기구를

수립한 모든 곳에서 시간은 권좌에 오른 왕의 이름으로 불리웠다. (그러나 그것이

대중들의 삶을 실제로 장악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시간성을 끌어맞출 수 있는 별도의

장치가 필요했다. 즉 그것이 없었던 시기에 제국의 시간, 권력의 시간이란, 여전히

순환적인 리듬에 따라 진행되는 대중들의 삶의 외부에서 겉도는 시간일 수밖에 없었다.)

이 경우 시간의 문제는 권력의 문제, 그래서 삶의 리듬을 둘러싼 투쟁 내지 지배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에서 신화적 시간, 종교적인 시간과 역사의 시간은 하나의 동일한 시간으로

결합되고 통일된다. 기독교에서 시간은 신에 의한 세계의 창조라는 명확한 시점을

갖고, 원죄와 타락으로 오염된 그 세계는 최후의 심판이라고 하는 종점을 향해서

달리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시간은 분명한 시작과 끝을 갖는 그러한 직선적인

시간이 된다. 시작을 가지며, 어떤 목적 내지 종결을 향해 달리는 시간, 그것은

바로 역사의 시간이기도 하다. 여기서 신화는 역사와 융합되고, 신화적 시간은

순환성을 벗어나 직선적인 것이 된다. 유명한 중세사가인 르 고프는 이렇게

쓰고 있다.


역사가 시작과 끝을 갖는다는 것, 이것은 매우 중요한 주장이다. 이러한

시작과 끝은 실증적인 동시에 규범적이고, 역사적인 동시에 신학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세 서양의 모든 연대기는 창조, 즉 아담에서 시작한다.

…… 그것은 최후의 심판을 사실상의 결론으로 삼는다. ........ 그러므로

중세 사제들과 이들의 청중에게 시간은 역사고 이 역사는 하나의 방향을

가진다. 그러나 역사의 방향은 몰락이라는 하강선을 따른다.


여기에서 시간이 실증적인 것은 그것이 역사적 실재성을 주장한다는 점과

결부되어 있다. 그것은 이제 신화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 역사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 시간이 규범적이라는 것은, 종말이 신의 ‘심판’으로

끝나기에, 역사적 현존이란 그 심판을 향한 과정이 되고, 언제나 그 심판하는

최종점에서 소급되는 판단에 의해 삶의 방식과 규범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현재는 언제나 기다리고 있을 그 최후의 심판 아래, 그 심판관의 시선 아래

놓여 있는 과거인 것이다.

여기서 기독교의 시간 개념 안에는 선/악이라는 범주가 작용하고 있음을

명확하게 볼 수 있다. 그것은 선한 자와 악한 자가 다른 최후를 맞는 시간이고,

그런 만큼 그 최후에 의해 규정되는 다른 과거이며, 선/악에 의해 규제되는

현재인 것이다. 선이 지배하는 시간과 악이 지배하는 시간, 그리고 그것의 교차와

대립, 이것이 규범으로서 기독교적인 시간이다. 이점에서 앞서 말한 ‘좋은/나쁜’

이란 범주에 의해 규제되는 시간과 매우 다른 성격을 갖는다. 최후의 심판을 담보로

무언가를 금지하고, 선/악의 범주를 통해 어떤 행위를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을 위축시킨다. 세속적인 악의 시간이 지속될수록 그것은 사람들을

오그라들게 만들 것이 틀림없다.

……………………………… ………………………………… ………………………………

신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 사이의 두번째 균열은 상인 내지 도시의 시간과 결부되어

있다. 상인들의 활동은 농민과 달리 자연적 시간과 리듬에 따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 당시 상업은 주로 멀리 떨어진 동방 등지에서 물건을 사다가 가격이 충분히 오른

적절한 때를 택해 물건을 파는 이른바 ‘원격지 교역’이었다. 이 경우 언제 물건을

사고 언제 물건을 내다 팔 것인지가 문제가 되었다. 혹은 직공들에게 돈을 주고

물건을 주문생산해 파는 선대제방식을 취할 경우에는, 주문한 물건을 언제까지

만들도록 요구할 것인지, 그 시간을 어떻게 확인할 것인지 등이 문제가 되었다.

전체적으로 매매와 관련된 계약은 자연적 시간과는 별도로 시간의 측정을 필요로

했다.

이를 위해 수도원과는 별도로 도시에 시간을 알리는 종이 등장한다.

사실 도시는 한편으로는 이른바 야만족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다른 한편으론 다른 세력들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높은 성벽을 쌓았고,

싸움이 벌어진 경우 그것을 알리고 시민들을 동원하기 위해 종을 사용하였다.

나아가 형의 집행을 알리기 위해, 노동시간을 알리기 위해 종을 사용했다고 한다.

중세인들은 종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그 종소리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었고,

그 종소리마다 ‘뚱보 자클린’이니 ‘롤랑의 종’이니 하는 이름을 붙여 구별했다고

한다.

여기서 도시의 종이 알려 주는 세속의 시간은, 교회의 종이 알려 주는 성직자의 시간과

대립한다. 상인의 시간은 다수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고, 교역이나 계약처럼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도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확실한 시간이어야 한다. 노동을 통제하기 위한

시간 역시 마찬가지로 확실한 시간, 엄밀한 시간을 요구했다.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 시기를 택하고 설정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시간적 지속의 기간을 양적으로

확인하고 통제하는 것이었다. 13~14세기에 발명된 시계가 적극 도입되고, 그것의 기술적

발전을 위한 노력이 경주되게 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도시의 청사 주위에 설치하게 되는 시계탑은 상인의 시간이 도시의 시간을 장악하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물론 시계 자체는 아직 기술적으로 취약해서 그다지 정확하지

않았고, 시계 바늘도 시침 하나뿐이었으며, 더구나 제한적으로 보급되었을 뿐이었지만,

도시의 권력과 결부된 새로운 시간성의 상징으로 부상했다. 상인의 시간, 그것은 자연의 시간이

아니면서 또한 종교적 시간도 아닌, 또 하나의 인위적 시간이 도시 안에 자리 잡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제 그것은 ’도시의 시간’이 된다.


*이진경,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