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창작 & Mash up

시간과 기계 그리고 공간과 인간 - 19

by Azzurro 2018. 3. 12.

근대라고 인식하는 시점부터

인간과 인간의 사이-공간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시계-시간이 붙박이처럼

들어선다.

그렇게 근대라는 비극의 제 1막이 시작된다.

*비빔 박선생

+++++++++++++++++++++++++++++

수레나 마차, 역마 등 이전의 수송수단에선 매우 중요한 고리였던 ‘사이 공간’이 기차 수송에서는 사라졌다. 기차는 단지 출발과 목적만을 안다.

그리하여 ‘풍광 공간’이 ‘지리적인 공간’으로 변환한다.

“지리적인 공간은 하나의 닫혀진, 그리고 그런 한에서 전체 구조 속에서 조망이 가능한 공간이다.”

요컨대 단 몇 시간 내에 전체를 눈앞에 펼쳐 보이는 파노라마! 이것이 여행의 새로운 배치였던 것이다.

우주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었던 것도, 별을 이민의 대상으로 간주할 수 있었던 것도 다 같은 맥락에 있다. 즉, 공간을 얇게 펼친다는 건 수 많은 ‘사이 공간들’의 소멸을 초래했다.

공감각의 증발

그와 동시에 여행자와 공간 사이의 긴밀하고도 내적인 관계 또한 파괴되어 버렸다. 그런 점에서 사이공간이 소멸된다는 건 인간과 공간 사이의 다양한 감각적 네트워크가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제 <열하일기>같은 여행기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그 여행기가 특별했던 건 출발지와 목적지 사이에 존재하는 무수한 사이 공간들로 인해서였다.

모두가 중국은 되놈의 나라라며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오로지 목적지만을 향해 나아가는 집합적 배치 속에서 연암은 끊임없이 ‘샌다’. 사이 공간들 속으로 그 속에서 그는 오감을 총동원하여 마주치는 모든 것들과 접속을 시도한다. 그 순간, 사이 공간과 그의 감각은 혼연히 뒤섞인다. 예컨대, 저 유명한 <호곡장론>의 경우만 해도 그렇다.

“훌륭한 울음터로다! 크게 한번 통곡할 만한 곳이로구나!” (열하일기, 박지원)

요동의 드넓은 광야를 마주하자 연암은 이렇게 탄성을 터뜨린다. 웬 울음? 물론 역설이다.

그런데 이 역설은 실로 다채로운 의미들을 분사한다. 먼저, 이 탄사는 ‘세계 최대의 문화제국’,건륭제의 청나라 문명을 접한, 한 변방의 지식인이 느낀 충격의 표현이다. 그런가 하면, 거기에는 끝없이 펼쳐지는 대지 앞에서 문득 엄습하는 생의 무상감이 깔려 있다. 또 다른 한편, 그것은 희로애락오욕, 곧 칠정의 극한에서 솟구치는 ‘생의 환희’로서의 울음이기도 하다. 즉, “기쁨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노여움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즐거움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사랑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욕심이 사무치면 울게” 된다.

“불평과 억울함을 풀어 버림에는 소리보다 더 빠름이 없고, 울음이란 천지간에 있어서 우레와도 같”은바, 지극한 정이 우러나오면, 그때 울음과 웃음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다가 아니다. 연암은 다시 묻는다. 갓난아기는 태어나자마자 왜 울음을 터뜨리는가?

물음도 느닷없지만, 대답은 더욱 가관이다. “아기가 태 속에 있을 때는 캄캄하고 막힌 데다 에워싸여 답답하다가, 하루아침에 넓은 곳으로 빠져 나와 손과 발을 주욱 펼 수 있고 마음이 시원스레 환하게 되니 어찌 참된 소리로 정을 다해서 한바탕 울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한다.

‘생에 대한 무한 긍정!’

이처럼 의미가 사방으로 분사될 수 있는 건 그만큼 이 텍스트 안에 다양한 감각들이 혼융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감각들은 부채살처럼 펼쳐지기도 하고, 혹은 극한을 향해 달려가기도 하고, 혹은 아주 다른 것으로 변이되기도 한다. 공감각의 퍼레이드!

<열하일기>에는 연암과 사이 공간들이 펼치는 이런 식의 화려한 수사학이 범람한다. 이런 배치안에선 연암이라는 존재 자체가 하나의 ‘사이 공간’이다. 낯설고 이질적인 흐름들이 자재롭게 어울릴 수 있는 ‘사이 존재’.

하지만 기차여행에선 이런 식의 공감각적 배치가 불가능하다. 공감각은 커녕 시각적 울림조차 향유하기 어렵다.

여행자와 공간이 접속할 수 있는 ‘사이성’이 모두 증발되었기 때문이다. 기차의 편리함과 속도는 그 대가로 주어진 것이다.

*고미숙, <계몽의 시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