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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 Mash up

시간과 기계 그리고 공간과 인간 - 18

by Ganze 2018. 2. 7.

기차가 연출하는 속도의 경이 앞에서 조선은 비로소 ‘시간-기계’속으로 진입한다.
“근대적 시간-기계는 ‘선분적 시간’”이라 할 수 있고,“이는 직선적, 추상적 시간의 선분적 분할과 그에 대한 특정한 활동내지 동작의 대응으로 구성”된다.
“여기에는 물론 각 순간이 갖는 시간성을 추상하고 그것을 동질화하는 과정이 전제되며, 이 점이 직선적 시간의 중요한 특징”이다.
(이진경,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중에서)


잘게 분할되면서, 직선으로 뻗어 나가는 근대적 시간의 이미지!

그것은 무엇보다 철도에 의해 표상될 수 있었다.

그 시간의 공간적 표상이 바로 시계다. 근대적 시간은 시계에 의해 지배된다. 시계는 시간을 잘게 쪼개서 공간적으로 배열해 놓은 기계이다. 시계는 처음엔 시간을 표시하기 위한 도구였지만, 그 도구는 곧바로 인간의 신체를 지배하는 존재로 전도된다. 시계를 신체에 새기는 것,
이것이야말로 문명인이 되는 첫번째 코스다.

<태극학보> 1호(1906년 8월)에 보면, 동경 유학생의 하루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책상 위에 걸어두 성매종이 땡땡 6점을’ 알리면 일어난다.

식사를 마치면 ‘벽상에 걸린 시종이 7점을 울린다.’

‘학교에 도달하여 10분씩 쉰 다음 수학,물리,지리 등을 정오까지 공부한다.’

‘정오로부터 0시 반 30분간은 점심시간, 각자 휴대한 점심을 먹은 다음 울리면 운동장에 모여 병식체조를 훈련하고 나머지 과목을 마친 다음 2점 반 폐학종과 함께 학교문을 나온다. ‘5점 종에 저녁을 먹고 우에노 공원 근처 연못으로 산보한다.’

‘학과 자습, 10점에 취침.’

말하자면, 아침에 눈을 떠서 다시 잠들 때까지 시계 종소리의 지휘를 받는 셈이다.

‘시계-인간’혹은 ‘시간-기계’의 등장 !

시간은 이제 분 단위로 분절되었다. 하루를 열두 단위로 나누던 것에서 분 단위로 구획된 시간 속으로 진입한 것이다.
이것은 시간을 촘촘하게 지각하는, 다시 말하면
빠르게 지나가는 것으로 파악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물론 근대 이전에도 지식인들에게 있어 하루의 일상은 촘촘하게 배열되었다.

다소 회화적으로 묘사되었지만, <양반전>에 나오는 양반의 하루 일과는 그야말로 빡빡하다.

“언제나 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서 유황에 불을 댕겨 기름불을 켜놓고는 두 발꿈치는 꽁무니를 고이고 앉아 눈으로 코끝을 내려다보고 있어야 한다. 얼음판에 박통 굴리듯이

<동래박의>를 죽죽 내려 외워야 한다.” “<고문진보>와 <당시품휘>를 깨알만큼 베껴
쓰되 한 줄에 백 자씩은 써야 한다.” (박지원, <나는 껄껄선생이라오>, 홍기문 옮김>

이 정도만 해도 대단히 강도 높은 일과에 해당한다. 멀리 갈 것 없이, ‘선의 전통’이
강한 사찰에서도 그 점은 충분히 확인된다. 학인 스님들의 일과는 새벽 3시에서 밤 9시
까지 잠시도 빈틈이 없다. 행주좌와, 어느 한순간도 화두를 놓쳐서는 안 되고, 좌선을
할 경우엔 ‘한호흡’까지 알아차려야 한다. 이런 건 동경 유학생의 시계로는 도저히 포착불가능한 미세단위에 해당한다.
또 한 가지. 한편으론 미세하게 분절되지만,
다른 한편 계절이나 일 년, 나아가 12간지, 60갑자, 겁 등 엄청나게 큰단위가 뒤에 배경으로 깔려 있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식의 시간의식을 모조리 꿈속에서 헤매는 것으로 취급했을까?
대체 왜? 해답은 간단하다. 그런 것은 ‘문명적’활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문명과
비문명 사이의 경계는 시간을 얼마나 잘게 쪼개는가가 아니라, 시간을 어떤 태도로
전유하는가에 달려 있다. 즉,’시간-기계’란 하루를 분 단위로 잘게 쪼개서 잘 활용해야
한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시간이 곧 금’이라는 명제에 절대적으로 복종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지금이야 시간이 금이라는 건 온 국민의 상식이지만, 당시로서는 실로 파격적인 발상이었다. 그 때문에, 계몽주의자들은 이 명제를 전파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인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1898년 4월 30일자 <매일신문>의 논설이다. 분량이 상당하지만,
한번 음미해 볼 만하다.

먼저, 서두는 “서양 글에 ‘때가 즉 돈’이라 하는 말이 있어 그 사람들은 만일 한 시각이라도
놀고 보내면 즉 돈을 몇 원 내어 버린 줄로 알아 누구든지 놀고 먹는 사람은 세상에 천하고

쓸데없는 인생을 대접”한다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은 그걸 모르기 때문에 일하기도 싫어할 뿐 아니라, 직업이 있어도 남한테 알리기를 부끄럽게 여긴다. ‘일 없이 논다’고 해야 체면이 더 선다는 것이다.

이런 한심한 습속을 맹렬하게 비난하고 난 뒤, 아주 구체적으로 ‘시간이 돈이 되는’ 과정을
설명해 준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서양의 경우, 한 명이 열두 시간씩 한 달 30일 동안을 일하고
월급 10원을 받은다 치면, 일당은 33전 3리 가량이고, 시간당 수당은 2전 5리가 된다.

만약 일을 못하면 그 시간만큼 월급을 감하게 된다. “그럼 고로 사람마다 잠시를 허비치 않고
밤낮 분주히 다투는 것이 시각”이라는 것이다. 그럼 이런 식의 계산을 전 국민으로 확대, 적용
하면 어떻게 될까?

*고미숙, <계몽의 시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