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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속으로

아무리 푸른 청춘도 삶이 곧바로 굽어지는 나라가 있다.

by Ganze 2016. 10.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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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오력, 노답, OO충, 헬조선·탈조선
지금 한국 사회를 달구는 키워드 너머를 상상한다!

선거철이면 으레 청년비례대표가 거론되고, 최저 시급·학자금 대출·취업 대책 들이 줄지어 여론의 도마에 오른다. 그런데 정작 그 안에서 청년의 목소리는 찾아보기 힘들고, 모든 것을 포기하는 나약한 세대(N포 세대), 이유 없이 과격해지는 젊은이들('일베')의 모습만 가득 나열된다.
청년문제에 대한 현안 분석을 넘어 한국 사회의 미래를 진단하고 진행 중인 유효한 대안을 찾기 위해 문화학자인 조한혜정과 엄기호가 젊은 연구자들과 뭉쳤다. '금수저·흙수저' 계급론, '헬조선' 담론이 성행하기 전부터 조짐을 읽어온 이들은 지난 1년간 청년 연구자들 간의 집중토론, 20~30대 청년 심층 인터뷰, '헬조선 포럼'을 비롯한 비공개 세미나를 진행하며 청년 당사자의 목소리를 듣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물인 이 책 [노오력의 배신]은 그들을 가장 깊이 이해하는 청년 연구자들이 '현실'에서 찾은 대안을 폭넓게 담고 있다. 조용하게 지내는 것만 같던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내 시행하고 있는 '청년 자치/협치 특구', 지방자치단체가 시행과정의 어려움을 뚫고 이제야 본격적으로 시행하고 있는 '청년 시민/국민 배당제도' 같은 것들이다. 그 외에도 사회·문화학자의 상상력으로 여러 나라의 사례를 국내 실정에 맞게 재조합한 제안들을 확인할 수 있다. '총체적 파국'으로 치닫고 있는 한국 사회를 '해방적 파국'으로 전환해내기 위한 이들의 노력은 붕괴하는 한국 사회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노오력'해도 NO답,
'조용한 분노'가 들끓는다

한국의 근대에서 '하면 된다'는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부모 세대의 삶 그 자체였다. 그들은 사회와 구조의 문제마저도 개인의 노력으로 끌어안고 경제성장을 이뤄냈다. 그런데 오늘날 '하면 된다'라는 노력의 신화는 유통기한을 넘긴 듯하다. '할 수 있다'는 자기계발의 시대를 지나 이제는 '해야 한다'는 '노오력'의 질서가 지배하고 있다. 조한혜정·엄기호 연구팀은 압축적 근대를 경험한 한국 사회가 발전 속도만큼 빠르게 붕괴되고 있는 현실의 원인을 찾기 위해 '노오력'을 대표 키워드로 잡았다. 한국 사회의 모든 문제를 '헬조선'이라는 단어 하나가 흡수한 상태에서, 그보다 더 빈번하게 인터넷에서 회자되는 단어인 '노오력'을 들여다보는 게 현실을 파악하는 지름길이라고 판단해서이다(['노오력'이 삶을 보호할 수 있을까?] 참조). 즉 '노오력'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청년들의 마음에 '헬조선'에 대한 분노가 생겨났다고 보기 때문이다.
'노오력'을 통해 청년들이 얻고자 하는 것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다. 직장, 가정, 관계 등 사회의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할 당연한 것들이다. 그런데 그것이 '하면 될' 줄 알았는데, 노력에 노력을 거듭해도 겨우 닿을까 말까 한 것들이 되어버렸다. 누구나 알고 있는 이 상황에 대해 기성세대들은 왜 분노하지 않느냐, 왜 연애·결혼·출산을 그렇게 쉽게 포기하느냐며 나무란다. 그런데 2015년 청년 담론을 지배한 키워드가 '헬조선' '금수저·흙수저' '노답' 등이라는 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조한혜정 교수는 "헬조선 담론은 한국의 청년들이 만들어낸 실천적, 이론적 움직임"이라고 말하며, 그들이 선택한 방법에 주목한다. "OECD 가입국 중에서 노동시간이 가장 길고 수면 시간이 가장 짧은 나라, 아무리 노력을 해도 답이 없는 나라, 자살률이 가장 높고 출산율은 가장 낮은 나라에서, 나라를 떠나거나 아니면 남아서 '벌레'가 되는 선택만 있다고 느끼는 청년들이 본격적으로 말하기 시작한 것"으로 바라본다.
저자들은 이 책에서 청년들이 조용하고 무기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의 뜨거운 목소리를 직접 전하는 방식으로 분명하게 밝힌다. 과거처럼 깃발을 들고 거리에 나오지는 않지만 누구보다 깊이 그리고 정확하게 현실을 파악하고 있으며, 서로를 보호하기 위한 다양한 실험을 계속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일례로 '노답 사회'라는 말은 적당한 해법으로는 한국 사회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이며, 한국 정치와 기성세대 및 조직은 문제 해결 능력도 의사도 없음을 간파한 단어이며([사회로부터 멀어지는 청년들] 참조), 이런 상황에서도 청년들은 해방구이자 놀이터, 일터, 삶터가 되는 공간들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이다(본문 211~214면 참조). 거대한 물밑에서 다른 어느 때보다, 다른 어떤 사회보다 더 과격하게 부글부글 끓고 있는 청년들의 마음을 확인하고자 한다면, 그리고 그 바탕 위에서 새로운 대안을 찾고자 한다면 이 책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한국을 떠나기로 한 청년,
청년 사회·문화학자를 만나다

청년들의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 연구팀은 그들 속으로 파고드는 과감한 방법을 선택했다. 3포니 5포니 N포니 하는 수많은 포기 속에서 결국 사회를 포기하게 된 청년들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자 한 것이다. 일찌감치 한국에 대한 기대를 접고 용접공이 되어 호주로 '탈조선'을 준비하고 있는 청년([왜 한국을 버릴 결심을 했을까] 참조), 이미 일본으로 '탈조선'을 한 연구자(나일등 [헬조선 밖에서 헬조선 바라보기] 참조), 한국의 청년실업 문제를 해결하고 글로벌 한국 이미지를 강화하겠다는 정부 정책에 따라 싱가포르로 해외 취업을 떠난 청년들의 이야기(이규호 [탈조선하거나 대한민국을 텅텅 비우거나] 참조)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 외에도 한국의 부조리한 노동 현실과 싸우고 있는 청년에서부터 학교가 얼마나 '노답'인지를 뼈저리게 경험하고 있는 특성화고등학교의 학생에 이르기까지 청년들의 이야기를 듣고 토론하면서 쌓은 결과물이 책 속에 고스란히 담겼다.
청년에게 말을 걸기 위해 초대한 사람들도 청년문제를 겪고 있는 청년 연구자들이었다. 이 책의 필자들이 대표적이다. 최은주·이충한·양기민·강정석은 각각 '노오력' '노답 사회' 'OO충(벌레)' '헬조선·탈조선'을 키워드로 잡고 한국 사회를 날카롭게 분석한다. 청년부채를 연구하는 천주희는 '노오력'의 비용을 확인하기 위해 청년실업자를 직접 인터뷰했으며(['노오력'의 비용] 참조), 이영롱은 끝없이 취업·이직을 준비하며 자기계발에 몰두할 수밖에 없는 민호(가명)를 만났다([민호 씨의 3년 후] 참조). 나일등은 '탈조선'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들려주며, 이규호는 해외 취업 청년들의 실태를 면밀하게 분석해 그 실상을 전해준다. 그뿐만 아니라 '잉여' '일베' 등을 연구해온 청년 연구자들을 초대하고, 때로 우리와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는 일본의 청년단체 활동가들을 찾아가 만나는 등 대상자와 연구자 모두 청년문제를 직접 몸으로 겪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찾은 결론은 분명하다. 청년문제를 청년만의 문제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앞으로 한국 사회의 기본 설계에 대한 문제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망가졌음을 '헬조선'이라는 극단적인 단어로 표현해내는 청년들에게 다시 사회를 고민하게 하자면, 당연히 그들의 이야기를 귀 담아 듣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간 "국가와 사회가 어디로 가야 할지에 대한 질문은 접어둔 채, 경제성장을 위해 무성찰적으로 질주"해왔음을 인정하고, 그 결과로서 오늘날의 청년문제가 비롯되었음을 이해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의미이다.

그럼에도 사회는 계속된다
헬조선은 끝나야 한다

연구팀을 이끈 조한혜정은 총체적 파국을 인지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오히려 이 상황을 해방적 파국으로 맞아들일 학습을 시작해야 한다고 제안한다([이 지옥을 사라지게 할 마술] 참조). 우선 청년들이 패닉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삶을 꾸려갈 수 있는 시간과 자원, 그리고 자치적 삶의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이를 위해 '청년 시민/국민 배당제도'와 '청년 자치/협치 특구'를 마련할 것을 제안한다. 일례로 2015년부터 이재명 성남 시장과 경제학자 강남훈 교수팀이 시범적으로 시행하는 청년 배당제도는 단순한 노동정의나 재분배의 차원을 넘어, 사회를 헬조선으로 인식하는 청년들이 사회적 해법에 대해 신뢰를 가지게 하는 첫걸음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주장이다. 사회가 미래를 상상한다면 청년들은 충분히 이에 호응할 것이라는 청년에 대한 신뢰가 바탕에 깔려 있다. 이러한 신뢰는 지자체의 실험만이 아니라 자생적 청년 동네가 생겨나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동사(우리동네 사람들)'가 대표적이다. 이곳의 청년들은 협동조합 방식으로 구입한 집을 공유하고, 주거 걱정 없이 각자 일을 하면서 어우러져 지내고 있다. 사회는 청년들의 실험을 받아들여 청년 자치/협치 특구를 만드는 방법을 고민해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곧 청년이 될 청소년들을 위해 '전환학년제'와 '갭이어(gap year) 제도'를 제대로 시행해보자고 주장한다. 전환학년제는 경쟁교육의 폐해를 절감한 아일랜드에서 시행해 큰 효과를 본 모델이다. 정부가 이를 본떠 시행하는 '자유학기제'는 입시 경쟁을 감안해 중학교 2학년 한 학기만 실시하고 있는데, 서울시 교육청에서 시범 시행하는 '오디세이'처럼 입시경쟁에서 벗어난 고1 학생에게 학교 밖 공간을 마련해주는 것과 같은 완전한 전환학년제를 시행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갭이어 제도는 좀더 적극적인 방법이다. 스무 살이 되는 청년 모두가 여행을 떠나게 해, 자신과 사회의 미래를 구상해보게 하자는 취지이다.
지금 한국의 대다수 청년들은 '노오력의 배신'을 경험하고 패닉에 빠져 있다. 그들은 노력과 노오력이 다르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노력이 가용 자원을 총동원해 목표를 달성하려는 개인의 의지라면, 노오력은 도달하기 힘든 목표를 초과달성하기 위해 합법과 탈법의 경계를 넘나들며 가용 자원 이상의 것들을 쏟아부으라는 사회의 요구이다. 게다가 사회는 개인을 책임지지 않고 오히려 모든 잘못을 개인의 자질과 태도, 나아가서는 '윤리'의 문제로 환원시키며 개인을 몰아붙이고 있다. '노오력'은 바로 그 사회의 채찍질인 셈이다(본문 12~18면 참조). 조한혜정·엄기호 연구팀은 [노오력의 배신]을 통해 국가와 가족만 있던 한국에서 이제는 사회를 고민해보자고 진지하게 제안한다. 우리 사회를 어떻게 바꿔가야 할지에 대해 머리를 맞대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자고 손을 내민다. "모든 것이 무너지는 듯한 지금" 둘러앉아 하는 이야기 자체가 이 지옥을 사라지게 할 마술을 부리리라는 것이다. "요즘 애들 왜 이래?"라고 한번쯤 생각해본 이들이라면, "기성세대는 안 돼"라고 한번쯤 생각해본 이들이라면 서로의 목소리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현재를 제대로 인식하고, 미래의 향방을 가늠하는 소중한 참고도서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출판사 서평 중에서




"일 vs. 일"에서 "일 vs. 삶"으로

한국사회 역시 틀림없는 저성장 시대에 접어들고 있으며, 경기는 날이 갈수록 나빠진다. 청년들의 실업률은 해마다 증가한다. OECD 국가 기준 작년 대비 청년실업률이 증가한 5개국 중 하나고, 1999년 통계 집계 기준 변경 이후 최고치라고 한다. 이처럼 경기가 나빠지고 취업난이 심각해질수록 안정적이고 오래 일할 수 있는 일자리에 대한 선호가 높아지는 것은 물론 일하는 것, 그러니까 임금노동을 할 수 있는 것,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야근을 하고 과로를 하는 것 자체가 특권으로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대부분 산업에서 나타나는 저임금, 실업, 불완전 고용, 그리고 많은 노동자들에게 닥친 불안정 고용 등이 모두 일과 관련한 문제다. 이런 문제들 때문에 과로는 많은 경우, 고용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특권적인 형태처럼 여겨지기까지 한다."(/ pp.11~12)
그래서일까? 최근 노동과 관련된 의제는 주로 실업률, 최저임금, 고용의 형태(가령 정규직/비정규직) 등 '일자리'의 수와 안정성, 그리고 '임금'의 문제에만 여전히 갇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더 높은 임금, 더 많은 일자리와 안정적 일자리는 당면한 주요 과제이고 많은 이들에게 절박한 문제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살기 위해서만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일을 통해 생계유지를 할 뿐 아니라 자신의 가치까지도 증명을 받는 것이 현대 노동사회 일의 의미다(물론 이 책은 생계유지를 위해 왜 꼭 임금노동을 해야만 하는지 그 전제에 대해서도 본질적 문제 제기를 시도한다). "일은 경제적 실천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실제로 모두가 일해야 한다는 사실, 즉 대부분이 임금을 벌기 위해 일하거나, 임금을 버는 사람의 부양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은 경제적 필연이라기보다는 사회 관습이자 규범 장치이다."(/ p.20) 또한 일의 문제는 생계뿐만 아니라 한 개인의 사회에서의 정체성, 지위 등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러니 이제는 좀 더 본질적인 질문도 제기되어야 하지 않을까? 지금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임금노동은 좋은 것인가?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인가? 그리고 이런 질문도 가능하지 않을까? 이토록 오래, 열심히 일해야 하고, 심지어 일을 즐기기까지 해야 하고, 삶의 에너지 대부분과 중요한 부분을 돈을 벌기 위한 일에 내어 줘야 한다면, 과연 최저임금이 상승하고 비정규직이 정규직이 되고, 더 좋은 일자리를 얻게 된다고 한들 우리의 삶은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인가? 이제는 더 좋은 일자리, 더 많은 임금을 향한 노력, 그러니까 일을 둘러싼 담론의 구도가 "일 대(對) 일"이 아니라 저자가 제안하는 것처럼 일에 맞선 삶, 삶의 중심에서 어떻게 하면 일을 더 밀어낼 수 있을지 고민하는 "일 대(對) 삶"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언제부터 일을 줄이고 삶을 누리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일을 얻어 내고자 하는 싸움을 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인가?

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열심히 일하는가?
:노동윤리와 가족윤리의 공모

미국의 여성학자이자 페미니즘과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노동 문제에 천착해 온 저자는 임금노동이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좋은 것(善)이라는 전제에 반기를 든다. 저자는 우리가 노동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일을 '탈정치화'시켜 왔다고, 즉 정치적 비판의 영역에서 일을 배제해 왔다고 주장한다. 특히 특정한 직업, 일자리의 문제에 대해서는 비판하면서도 현대사회의 노동 자체에 대해서는 정치적 논의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 것을 비판하며 일의 문제를 다시 정치의 문제로 되가져온다. "노동윤리의 핵심에는 성실한 노동, 긴 시간의 노동이 고결할 뿐 아니라 그런 노동이 불가피하다는 가정이 놓여 있다. 그리고 이런 가정은 반박되기는커녕 제대로 검토되어 본 적도 별로 없다. 어째서 일하고, 어디서 일하고, 누구와 일하고, 일할 때 무엇을 하고, 얼마나 오래 일하는가가 사회적 합의이고, 따라서 당연히 정치적인 결정인 것이라면, 이러한 영역 중 더 많은 부분을 어떻게 해야 토론과 쟁투의 범위로 되찾아올 수 있을까?"(/ p.63)

저자는 사람들이 살기 위해 일하는 것을 넘어 일하기 위해 사는 데에는 산업화 시대와 탈산업화 시대까지를 지배하고 있는 노동윤리가 가장 큰 몫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저자는 근면한 노동을 요구했던 과거의 노동윤리부터 모두가 일을 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신자유주의의 요구(가령 미국의 경우 일을 해야만 복지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법이 개정되기도 했다)와 노동자의 근면한 손뿐 아니라 마음과 감정까지도 요구하며 스스로 자기관리의 주체가 되어 가치를 창출하고 일을 즐기는 프로페셔널이 되도록 내몰리고 있는 탈산업화 시대의 노동윤리까지, 변화해 온 자본주의의 구조 저변에 흐르고 있던 노동윤리의 변화를 면밀히 살핀다. 또한 노동조건의 개선과 무급노동의 가치를 인정하라며 싸워왔던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을 포함한 진보적 정치 운동마저도 노동을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활동으로 받아들였던 것을 함께 지적하며 노동윤리의 강력한 영향력을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여기에 더해 저자가 노동사회를 유지시키는 데 노동윤리 만큼의 강력한 기제로 작동해 온 것이 바로 가족윤리라는 점을 지적한다. 가족 제도는 임금노동의 중요한, 잘 드러나지 않는 요소로 이는 "임금을 버는 이들의 임금을 벌지 않는 이들에 대한 사회관계로서 실업자, 노인, 병자, 아이, 그리고 주부들"을 포함하는 포괄적 범주이다"(/ p.192). 또한 가족 제도는 잘 알려진 것처럼 사회적 재생산의 사유화된 장치다. 가족 내에 무급 가사노동을 수행하는 여성이 없어 사회적 재생산의 기능을 하지 않을 경우 개인들은 가정 내에서 생산되는 재화와 서비스를 상품화된 등가물을 통해 확보하거나 임금노동을 한 이후에도 시간이 충분해 그것을 직접 생산해야 한다. 즉 임금은 더 높아야 하고 노동시간은 더 짧아져야 하는 것이다. 때문에 현재 사유화된 재생산의 기제로 작동하고 있는 가족 제도는 노동 가격 인하를 흡수하고 저렴하고 더 유연한 여성화된 노동 형태를 제공하고, 사회적 재생산 비용을 사적으로 책임지고 있는 셈이다. 이는 페미니즘의 오래된 지적이다. 젠더 분업을 포함하는 가족윤리는 노동윤리와 더불어 지금의 노동시간제와 임금노동의 구조를 지속적으로 지탱하는 두 가지 축이다. 옮긴이는 저자의 주장에 이어 이렇게 지적한다. "두 윤리의 공모 아래, 우리는 마치 과로가 특권인 양 끝없이 일하며, 이에 더해 당신이 '일하는' 여성이라면, 직장에서는 덜 받고 일하고 집에서는 아예 받지 못하고 일한다. 심지어 집에서의 일은 일로서 대접받지도 못하며, 그 탓에 임금노동을 하지 못한 시기는 '경력이 단절된' 시기로 취급받는다."(/ p.362)

일을 넘어선 삶을 향한 대담한 요구
:조건 없는 기본소득, 주30시간 노동에서 시작하는 탈노동사회를 향한 전망

저자는 생산 중심주의에 매몰되어 있던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의 주장을 비판적으로 분석하지만 또한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에서 임금노동으로 좁게 규정지어진 일의 개념을 확장하고 반노동(antiwiork) 담론과 탈노동(postwork)사회로의 정치적 상상의 단초를 다시 끌어올린다. 바로 조건 없는 기본소득과 임금 감축 없는 노동시간 단축(주30시간 노동)이다.
먼저 저자는 무급 가사노동의 유급화를 주장하던 1970년대 페미니즘 운동을 재해석하는 데서 출발해, 과거의 노동윤리를 거부하고 기본소득을 요구하자는 대담한 주장을 펼친다. 기본소득은 가사노동과 같은 무급노동에 대한 보상으로 작동할 수 있으며, 포스트-포디즘 시대의 노동조건(생산 및 재생산 부문이 상호침투적으로 변하고, 무급노동과 유급노동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풀타임 종신고용직이 사라져가는 변화들)에 훨씬 잘 부합하는 제도라는 것이다. 단지 시민이라는 이유만으로 제공되는 기본소득은 무엇보다 노동윤리를 거부할 수 있는 선택지를 준다. 그리고 이때 "돈을 버는 일이 다른 모든 정치적 또는 창조적 활동에 앞선다는 '상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p.363) 기본소득에 이은 저자의 요구는 노동시간 단축이다. 특히 저자는 일-가족 균형을 노동시간 단축의 근거로 삼는 것을 경계하며(전통적 가족규범을 강화하므로), 가족의 이름보다 자유와 자율이라는 목표를 중심으로 노동시간 단축을 성취하기 위해 싸우자고 제안한다. 저자는 노동시간의 단축을 통해 얻어낸 시간은 임금노동 밖의 삶을 찾을 수 있는 시간, "새로운 주체성, 새로운 노동과 비노동의 윤리, 돌봄과 사회성의 새로운 실천을 구성할 공간을 창조할 시간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바로 "우리가 의지하는 것"을 위한 더 많은 시간을 요구하는 싸움이라는 것이다. 이는 더 나은 노동을 위한 투쟁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더 적은 노동 역시 마찬가지로 중요하다는 점을 환기시키는 작업이기도 하다.

한국사회에서 역시 조건 없는 기본소득과 노동시간 단축은 중요한 의제로 떠오른 바 있다. 하지만 늘 이런 주장에 비판적인 논자들은 "현실적이지 않다"라는 말로 응대를 하곤 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 책을 우리말로 옮긴, 새로운 방식의 일하기를 지속적으로 고민하고 있는 옮긴이의 말로 마무리를 하는 것이 좋겠다. "누군가에게 이런 요구들은 너무도 '비현실적'이고, 그래서 낭만적인 유토피아주의로 폄훼될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이유로 저자는 한 장을 통틀어 주장한다. 유토피아는, 제대로 쓰일 때, 한계를 짓기보다는 가능성을 열어 준다고. (...) 다른 세상을 가능할까? 이 질문에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마치 다른 세상이 가능한 듯이 요구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존재할 때만, 비로소 다른 세상의 가능성이 생겨난다. 나는 이 책을 옮기면서 그렇게 믿게 되었다."(/ p.363)
끊임없이 일하도록 요구받는 동시에 언제나 불안감에 노출되어 있는 이들에게, 그리고 일을 일자리와 직업의 문제로 국한하지 않고 사회와 개인의 삶을 구축하는 근본적 축으로 조망하는 관점을 알고 싶은 이들에게, 그리고 지금의 노동사회와 일을 고민하며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대안을 구체적으로 고민하고 있는 이들 모두에게 일독을 권한다.

*출판사 서평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