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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 Mash up

시간과 기계 그리고 공간과 인간 - 5

by Ganze 2017. 7. 15.

미하엘 엔데의 <모모>(1970년)를 읽은 독자라면 누구든 이 동화가 시간 이야기라고 할 것이다. ‘시간 도둑들과 도둑맞은 시간을 찾아 주는 한 소녀에 대한 신기한 이야기’라는 긴 부제 또한 시간의 주제를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다. 어디 그 뿐인가. 매우 기발한 캐릭터인 세쿤두스 미누투스 호라 박사의 이름은 라틴어로 시간의 단위 초·분·시를 의미한다. 호라 박사와 함께 사는 신비한 거북 카시오페이아 역시 속도와 시간의 의미를 암시한다. ‘시간의 꽃’을 들고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달려가는 모모의 모습에서 시간 이야기는 그 절정에 이른다. 그 외의 등장인물들 역시 느긋한 시간의 삶을 살다가 회색 도당들에게 시간을 저당 잡힌 뒤 시간에 쫓기는 삶을 사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모모>는 우리에게 시간의 이야기만 하는 걸까? 그렇지 않다. 시간을 이야기하면서 무엇보다도 공간의 의미를 전하기 때문이다. 이는 우선 작품 속 다양한 장면 묘사에서 관찰할 수 있다. 엔데는 이야기의 시작부터 원형극장과 그 주변을 세세히 그리고 의미 있게 설명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쓴다. 즉 공간의 의미를 전하기 위해 시간을 늘려 이야기하는 것이다. 모모가 카시오페이아의 인도를 받아 호라 박사를 찾아갈 때도 공간의 교묘한 배치를 이용해서 이동하는 것을 묘사한다. 호라 박사는 모모에게 “카시오페이아는 시간의 밖에” 있다고 말한다. 미래를 내다보는 이 오묘한 거북은 시간의 밖에 있음으로써(즉 시간을 무시함으로써) 가장 공간적이다. 그는 한없이 느린 동작으로 공간의 저 미세한 구석까지도 음미하면서 살기 때문이다. 시간을 우아하게 무시하는 그의 동작은 공간을 만끽하는 방법이다. 시간과 공간의 역설적 관계에 대한 뛰어난 은유는 그 어느 것보다도 모모의 절친한 친구 베포 할아버지의 ‘비질하기’에 있다. 청소부 베포는 “한 걸음, 한 번 숨쉬고, 한 번 비질... 그러다가 가끔 멈춰 서서 생각에 잠겨 앞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뒤쪽에 깨끗한 거리를 두고, 앞에는 지저분한 거리를 두고 그렇게 청소를 하다 보면 종종 위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베포는 공간을 관조하면서 비질을 함으로써 찬란한 삶의 의미들을 사유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회색 신사에게 시간을 담보 잡힌 뒤로는 시간에 쫓겨 한 치 앞에 놓인 공간에도 눈길 한 번 주지 못한 채 서둘러 비질을 계속하는 일상을 보내야 한다. <모모>는 시간 도둑들에 속아 시간에 쫓기고 시간을 불필요하게 아낌으로써, 공간의 의미와 아름다움을 상실하게 되는 사람들의 이야기인 것이다. 모모가 호라 박사에게서 받은 ‘시간의 꽃’으로 회색 도당들의 시간 창고를 파괴함으로써 시간은 되돌아오고 정지되었던 공간은 다시 살아난다. 모모가 사건을 해결함으로써 마을 사람들이 진정으로 되찾은 건, 시간이 아니라 공간인 것이다. 삶의 의미로 충만한 공간 말이다. <모모>의 또 다른 비밀은, 모모라는 이름조차 공간적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독일 남부 출신인 엔데는 삼십대 중반 이후 로마 근교에 이주해서 살았다. 여기서 모모의 이야기를 구상했다. 로마는 라틴어의 발생 지역이다. 라틴어에서 유래한 ‘모(mo)’는 이탈리아어로 ‘지금’이라는 뜻이다. 특히 로마 지역 사람들이 회화에서 자주 쓰는 ‘모’라는 말은 ‘흐르는 시간에서 떼어낸 현재’라는 뉘앙스를 갖고 있다. 그러니까 ‘모모(momo)’는 지금이라는 의미의 강조적 반복이 된다. 이야기 속에서 모모는 매우 충실하게 현재를 산다. 옛 원형극장 터에서 동네 사람들이 전하는 현재의 삶에 관한 소리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들어주는 게 모모의 미덕이지 않았던가. 모모는 아낌없이 현재를 살기 때문에, 과거의 어느 때인가 태어나서 미래의 언제인가 사라지는 존재가 아니라, 그의 말처럼 “언제나 있는” 존재인 것이다. 바로 여기에, 그의 이름처럼, 흘러가는 시간으로부터 해방된 모모의 현재성이 있다. 그러므로 그는 시간적 존재가 아니다. 사람들이 흔히 놓치는 것이지만, ‘현재’는 시간적 개념이 아니라 공간적 개념이다. 현재에 대한 인식은 삶을 시간 밖으로 끌어내 ‘의미의 공간’에 안착시키는 기제이기 때문이다.

*김용석, 영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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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의 변화가 시간이고
​바다의 잔상이 파도인 것처럼
​여기에 일어난 일의 잔상이 기억의 순차로
느껴져서 자꾸 별개의 시간이 존재하는 것으로착각하는 거야.
​공간,바다,여기에 오롯이 집중해 봐!
시간, 파도, 기억은 사라져 버릴거야!
공간, 그러니까 또 하나의 공간인
우리의 몸이 변화의 필드고 주인이야.
우리가 결코 놓쳐서는 안되는 이것!
나와 관련된 모든 변화는 누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만든다는 것!
우리가 잃어버렸던 공간과 몸의 주인으로
다시 돌아와야 해!

-소설 '마나인더마블스' 중에서
*비빔 박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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