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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속으로

송곳과 이끼 1

by Ganze 2016. 3. 2.

그 사람들한테 우리는 가축이요,
뺏어도 화내지 않고 때려도 반격하지 않으니까.
인간에 대한 존중은, 두려움에서 나옵니다.
살아있는 인간은 빼앗으면 화내고 맞으면 맞서서 싸웁니다.
*웹툰 '송곳' 중에서


현재의 한국사회를 만든 것은 결국 386과 같은 기성세대라고 김씨는 말했다. 물질만 좇다 보니 나온 경쟁의식, 나만 잘돼야 한다는 의식이 사회 전반에 뿌리내렸다. 비정규직은 늘어났고 해고시스템은 갈수록 유연해졌다. 거대 공룡 재벌들을 탄생시키면서 경제 발전을 이뤘지만 역으로 내줘야 했던 것은 혁명이 아니면 해결할 수 없는 이 사회 불평등 구조였다. 그러면서 이율배반적인 어른들의 모습은 계속됐다. 사교육 과열 풍토를 걱정하면서 자기 자식은 누구보다 먼저 사교육을 받게 하고, 정부의 토건사업을 비판하면서도 부동산을 찾으러 돌아다닌다. 김씨는 “완전히 모순이다. 그 모순에 386이 가담하고 있는 것”이라며 “그걸 통해서 자기 자식이 출세하고 성공을 하느냐? 아니다. 근데 거기 동참하지 않으면 처질까봐 그래서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경향신문, "386세대, 괴물과 싸우다 괴물이 됐다" 기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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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과 싸우다가 괴물이 되지 않으려면
애초부터 다른 접근법을 가져야 한다.
괴물의 핵심이나 정면이 아닌
내부/외부 어디에서나 표도 나지않을 만큼
시스템의 미세 단위에서 부터
들러 붙어야 한다.
그것은 어떤 조직을 결성하고 침투하는
전략/전술법이 아니다.
옳다/그르다의 분법이 아니다.
아군/적군의 개념이 아니다.
빅브라더가 구성원들의 출생 전부터 '세뇌'작업을 실행하듯 감시가 포착되지 않는 곳에서 바이러스처럼 침투하는 '이끼'같은 기물(奇物)로 생존하는 것이다.
각 개인/개체가 '목적이 없는 생존방식'으로
그냥 기물이어야 한다.
기물이란 것은 자신의 그냥 삶이
시스템이나 빅브라더에게는
그냥 폐로 인식된다.
한쪽의 미미한 생존이
기득권 시스템에게 찝찝하고
불길하게 폐를 끼치는 것이다.
각 개체의 생존이 어느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숙주의 근간을 흔드는 것이다.
기물은 그렇게 선거/소환제도가 없이도
의도하지 않은 자정능력을 발휘한다.
기물은 일부 개체들이 숙주와 함께 파괴돼도
남은 다른 개체들이 그대로 생존활동을
영위한다.

모든 온/오프 라인 및 가상 사이트가
기물의 탄생지가 될 것이다.

과연 우리사회에서는 이끼/기물 개인들이
탄생할 것인가?

*비빔 박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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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들의 비유를 빌리자면 이제까지의 서양의 사유는 일종의 장기 게임과 비슷한 것이었다. 즉 각각의 개체는 특정한 이름이 부여되어 ‘주체’가 되지만 이 주체는 실제로는 가는 길과 역할이 고정되어 있는 노예와 비슷했으며, 게다가 장기의 모든 게임은 국가의 왕을 지키는 것을 중심으로 짜여져 있다. 저자들은 이러한 논리를 ‘나무형 사유’라고도 부르는데, 뿌리와 줄기가 가지와 잎이 일직선으로 연결되어 있는 이러한 국가형 사유 모델이 지난 2000년 동안 서구의 현실과 사유를 동시에 지배해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철학은 항상 감성-오성-이성으로 연결되어 일직선으로 상승되어야 하며, 이것은 정치에서도 그대로 복제되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리스 철학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는 현인 왕(또는 철학자=왕이라는 이미지)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서양의 사유 방식은 항상 기호학을 법칙으로 하는 위계적이고 중심적이며, 천상적인 성격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궁정의 게임인 장기와 달리 동양의 재야 선비들의 게임인 바둑은 모든 돌=주체가 평등하며, 따라서 왕도 신하도, 주체도 객체도, 또 이미 정해져 있는 길도 없는 유목적 사유의 전형을 보여준다.

최근의 인터넷처럼 모든 돌이 동일한 주체로서 다양한 연결로와 교통망을 통해 평등하게, 또 계속 새로운 사유를 함께 만들 나가며 여기저기서 즐거움을 창조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중심도, 주체도, 위계도 없는 사유의 전형인 셈이다. 그리고 장기가 기호학의 법칙을 추구한다면 바둑은 다양한 연결선들의 봉쇄와 차단과 연결과 접속(저자들은 조금 어렵지만 이것을 영토화, 탈영토화, 재영토화 등의 개념으로 부르고 있다)으로 짜여지는 거대한 네트(net)적 사유의 창조 행위 자체인 것이다. 최근 우리는 중심과 질서가 없어져 간다는 비탄조의 이야기를 자주 듣고있지만 두 사람은 이러한 상황을 새로운 창조와 변신의 기회로 멋지게 전환시켜 보여주고 있다. 두 사람의 생각은 질서냐 아니면 무질서냐, 또는 국가냐 아니면 아나키냐 하는 대립축으로 문제가 설정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비질서들’의 접속들이 새로운 시대의 모럴이 되어야 한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것이 얼마나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는지를 금방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말은 1장의 리좀 대 나무부터 시작해 주체와 다양체, 매끈한 것과 홈이 패인 것, 국가의 포획 장치 대 유목민의 전쟁 기계 등의 새로운 대립쌍으로 변주되면서 기존의 모든 인문학과 사회과학, 고고학, 생물학의 성과들을 재검토하는 멋진 시험지가 되고 있다.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저 '천개의 고원' 서평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