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슈 & Now

버텨내는 용기, 운수는 세월을 버텨낼 때 비로소 작동한다.

by Ganze 2015. 3. 2.

​우리 인생의 주방에서 상황과 관계라는
재료로 어떤 요리를 할 때
가장 많이 쓰이는 용기가
'버텨내는 용기'가 아닐까요~

*비빔 박선생




- 왜 당신은 변하지 않는가?

- 왜 당신은 열등감을 극복하지 못하는가?

- 왜 당신은 지금 행복을 실감하지 못하는가?

- 왜 당신은 타인의 인생을 사는가?


당신은 자유로워질 용기를 가졌는가?

당신은 평범해질 용기를 가졌는가?

당신은 행복해질 용기를 가졌는가?

당신은 미움받을 용기를 가졌는가?


인간은 누구나 지금 이 순간부터
행복해질 수 있다.

*기시미 이치로




아이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쾌락을 얻으려 하는데 주위의 세계는 그것을 방해합니다. 따라서 아이는 자기 만족을 얻기 위해 싸우려는 욕구를 갖게 됩니다. 이같은 순수한 공격욕구는 때리거나 무는 행위를 통해 나타나는데 스포츠, 경쟁, 결투, 전쟁, 지배욕, 종 교적,사회적,국가적,인종적 다툼 같은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 p.22)

경험 자체가 아니라 경험에 부여한 의미에 따라 우리의 인생은 결정됩니다. 따라서 특정 경험을 앞으로 살아나갈 인생을 위한 기초로 받아들이면 자칫 잘못을 저지르게 될 수도 있지요. 의미는 상황에 따라 정해지는 게 아닙니다. 상황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상황이 정해지는 겁니다.
(/ p.31)

인간은 외부 자극이나 환경에 단순히 기계적으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자연재해나 사건.사고를 직접 당했을 때는 말할 것도 없고, 가족이나 친지가 상처를 입거나 목숨을 잃었을 때 누구나 큰영향을 받지만 모든 사람이 똑같이 받아들이는 건 아닙니다. 마음에 상처를 입어 오래도록 아파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곧 충격에서 벗어나 재기하는 사람도 있지요. 결론적으로 외부 작용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는 우리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행위자actor이지 결코 반응자reactor가 아니란 말이지요.
(/ p.32)

우리가 화를 내는 것은 내 생각을 강하게 주장함으로써 상대가 그것을 인정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내 생각을 주장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는 건 아닙니다. 다만 화를 냈을 때 자기 주장이 제대로 전해지는지는 의문이지요. 어쩌면 화를 내서 자기 말이 통했던 경험이 있었을지도 모르죠. 아마 그보다 효과적인 방법을 알았다면 그것을 선택하겠지만 화를 내는 사람은 그걸 알지 못했을 겁니다.
아들러는 분노라는 감정이 어떤 행동을 하도록 부추기는 건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다른 사람이 내 생각을 받아들이게끔 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보았지요.감정이 사람을 완전히 지배하는 건 아닙니다.
(/ p.46)

아들러는 세계, 인생, 자기 자신에 대해 의미부여하는 것을 라이프스타일lifestyle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흔히 성격이라고 부르는 것이죠. 라이프스타일이 겉으로 드러나면 그게 곧 성격이지요. 성격은 대개 선천적으로 타고난다고 여겨서 바꾸기 어렵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란 거죠. 성격을 바꾸는 게 결코 간단한 일은 아니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 p.52)

우리는 타자를 친구로 볼 것인지 적으로 볼 것인지 먼저 결심하게 되는데, 이때 타자를 적으로 보는 사람은 인생의 과제도 회피하려고 하지요. 적이라고 생각하는 타자와는 적극적으로 관계하지 않는 게 인지상정입니다. 이처럼 타자를 친구로 볼 것인지 적으로 볼 것인지는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과 관련된 것이어서 둘 중 어떤 태도를 취할지 결정해야만 합니다. 이것은 타자의 존재 여부를 인정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타자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가치의 문제입니다.
(/ p.88)

타자에게 관심을 갖는 게 중요한 이유는,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통해서만 타자를 보기 때문입니다. 내가 보고 듣고 생각하는 방식이 유일하지도 절대적이지도 않다는 걸 알지 못하면 타자를 이해할 수 없지요. 따라서 ‘타자는 이해할 수 없다’는 전제 하에 타자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오히려 타자를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타자를 자신이 안다고 생각하고 있으면 자신의 이해가 잘못되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니까요.
(/ p.96)

특히 남다른 야심을 가진 사람은 자칫 어려운 상황에 처하기 쉽습니다. 성공했느냐 못했느냐만 놓고 모든 걸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역경에 맞섰을 때 그것을 극복할 힘이 있는가를 판단하는 습관이 붙지 않은 것이죠. 결과를 창출하는 것은 분명히 필요한 일이지만, 단지 결과를 내놓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지요. 결과를 내놓기 위해 뭐든 해도 좋은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역경과 맞닥뜨렸을 때 그것을 극복할 힘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성공에 더 관심이 많지요. 그러나 노력하지 않고 얻은 성공은 쉽게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그런 사람은 실패하면 두 번 다시 역경과 맞서려고 하지 않습니다.
또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만 생각하는 사람은 성공을 하고도 칭찬받지 못하면 결코 만족하지 않습니다. 타인의 칭찬 없이는 못 살지요. 그러다 보니 타인의 의견에 이리저리 휘둘리지요.
(/ p.110)

아들러는 부모에게 응석부리는 아이는 착취자가 된다고 말합니다. 가령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아이가 있다고 합시다. 그 아이의 어머니는 "우리 애가 말이 늦다"며 아이의 통역을 자처합니다. 통역이 있으니 아이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부모가 대신 이야기해주기 때문이지요. 아이가 이야기를 끝내기 전에 부모가 참견하거나 아이 스스로 대답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기도 합니다. 이렇게 부모 뒤에 숨어 있는 한 세계는 안전합니다.
(/ p.131)

타자에게 받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기고, 타자가 나에게 무엇을 해주었는지(평가를 요구하는 것도 그중 하나)에만 관심을 갖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지요. 물론 인간은 타자와 떨어져 살아갈 수 없고, 이 세계에 소속되고자 하는 기본적인 욕구를 추구합니다. 하지만 내가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지요.
내가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이 타자의 기대를 채우기 위해 사는 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물론 맞는 주장이지요. 다만 그렇게 주장하고 싶으면 타자에게도 그런 요구를 해서는 안 되지요. 내가 타자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사는 게 아니라면, 타자도 남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사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 p.176)

나의 가치는 타자의 평가에 달려있는 게 아니니까요. 한심한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해서 내가 정말로 한심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타자가 나를 높게 평가했다고 해서 그 평가에 의해 내 가치가 높아지는 것도 아니지요. 타자의 평가는 나의 가치를 높이지도 낮추지도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동일한 평가를 할 리도 없죠. 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도 분명 있습니다. 비록 아무도 나를 높이 평가하지 않지만 그것이 내 가치를 낮추지는 않습니다.
(/ p.198)

< 기시미 이치로 '버텨내는 용기'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