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면 바로 써 먹어라 써 먹으면 또 배우게 되고 또 다시 써 먹을 수 있다.
이렇게 앎과 행동이 선순환의 리듬을 타게
만드는 것이 각자에게 주어진 운명의 열쇠다.
배우기만 하는 습성은 이제 좀 버려라!
*비빔 박선생 土 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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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 스승들은 말한다. "배움만이 기질을 바꿀 수 있다"라고. 기질을 바꾸면 운명이 바뀐다. 거꾸로 배움이 없이 삶을 바꾸기란 불가능하다. 동의보감은 그 원리와 이치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멘토 중의 멘토다. 거기 담긴 '의역학(醫易學)'적 비전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싶었다. 그걸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앎이 곧 길이고 명(命)이다! 모두들 이 길 위에서 앎의 기쁨을 누리시기를, 그리하여 가는 곳마다 운명의 주인이 되시기를! >
"평생 공부하고 글 쓰겠어요. 자식이나 직업, 이런 거엔 영 인연이 없구먼요." 처음 역술원에 갔을 때였다. 아니 어떻게 알았지? 생년월일시만 보고서? 이게 사주명리학에 대한 내 첫 경험이다. 그로부터 몇 년 후 '동의보감' 잡병편을 공부하다가 마침내 사주명리학과 만나게 됐다. 잡병편은 오운육기(五運六氣•하늘은 다섯 가지 기운으로, 땅은 여섯 가지 기운으로 돌아간다)로 시작한다. 그걸 따라가려면 육십갑자(六十甲子)의 원리를 배워야 한다. 육십갑자를 사람의 인생에 적용하면 사주명리학이 된다. 아주 초보적인 내용을 배운 후 내 사주를 직접 뽑아보았다. 하, 이럴 수가! 내 팔자에는 소위 '조직운(관성)'과 '공부운(인성)'밖에 없다. 자식운도 없고, 직업운도 없다. 조직과 공부, 둘을 합치면 지식인 공동체가 된다. 뭐야? 이렇게 쉬운 거였어?
물론 육십갑자의 이치를 통달하려면 아주 높은 경지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걸 다 깨달은 후 '삶의 기술'로 쓰는 건 아니다. 한글의 원리를 다 터득한 다음 한글을 쓰는 게 아니고, 디지털의 오묘한 이치를 깨친 다음에야 스마트폰을 쓰는 게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아는 만큼 즐기고, 배운 만큼 쓰면 된다. 문제는 이 앎의 향유를 가로막는 마음의 장벽이다.
먼저 음양오행론 혹은 사주명리학은 도인이나 무속인의 전유물이라고 간주하는 습속이 있다. 이런 표상에는 이중적인 방식의 배제가 작동한다. 사주명리학을 고매하고도 신비로운 차원으로 여기는 것, 혹은 지식 이하의 저급한 술수로 취급하는 것. 신비 혹은 미신. 두 가지 모두 명리학을 '지식의 외부'로 축출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이때 지식의 범주와 경계는 철저히 서구적 인식론을 기반으로 형성된 것이다. 서구의 시선으로 다른 지역의 문화를 타자화하는 것을 오리엔탈리즘이라고 한다면, 이 또한 오리엔탈리즘의 일종이나 다름없다.
더 놀라운 건 이렇게 신비와 미신 '사이'에 묶어 둔 뒤 그 핵심과 정수는 상류계급이 독점해 왔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 재벌이나 정치가들 중에 역술가나 풍수가의 상담을 받지 않는 이가 얼마나 될까. 올해는 '선거의 해'다. 정치가들 못지않게 역술가들도 대활약을 펼칠 것이다. 초월적 신비의 산물이거나 허무맹랑한 미신에 불과하다면 과연 이렇게 할 수 있을까?
자연의 이치 속에서 존재와 운명의 비의를 탐색하고자 한 인류의 노력은 아주 연원이 깊다. 에니어그램과 별자리, 수상과 관상, 풍수지리 등 인류가 고안해 낸 다채로운 운명론 가운데 사주명리학은 단연 독보적이다. 무엇보다 의학과의 긴밀한 결합이 가능하다는 것이 최대 장점이다. 음양오행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몸과 우주, 그리고 운명을 하나로 관통하는 '의역학'이라는 배치. 말하자면 가장 원대한 비전 탐구이면서 동시에 가장 실용적인 용법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삶의 모든 것이 우연일 뿐이라면 개입의 여지가 없다. 또 모든 것이 필연일 뿐이라면 역시 개입이 불가능하다. 지도를 가지고 산을 오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어진 명을 따라 가되 매순간 다른 걸음을 연출할 수 있다면, 그때 비로소 운명론은 비전 탐구가 된다. 사주명리학은 타고난 명을 말하고 인생의 길을 말한다. 여기서 핵심은 '앎'이다. 아는 만큼 걷고, 걷는 만큼 열린다. 신비와 미신의 그림자를 벗어나는 길 또한 거기에 있다.
운명의 주인이 돼라
드디어 마지막 회다. 경칩(驚蟄)에 시작하여, 상강(霜降)에 마치게 되었다. 연재를 하는 동안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가을이 왔다. 이제 곧 겨울이 올 것이다. 과연 세상은 무상하다. 이 무상함이 우리를 살게 하고 이 우주를 움직이게 한다. 연암 박지원은 말하기를, "하늘과 땅이 오래되었으나 끊임없이 만물을 낳고, 해와 달이 오래되었으나 그 빛은 날로 새롭다…. 썩은 흙에서 영지(靈芝)가 생겨나고, 썩은 풀에서 반딧불이 생겨난다."(초정집서)
그걸 증명이나 해주듯 시절의 분위기도 눈에 띄게 달라졌다. 먼저, 2008년부터 불기 시작한 인문학 '붐'이 올해 들어 전방위로 확대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여름부터 갑자기 '싸이'라는 키워드가 세계를 강타하고 있다. '인문학 붐'과 '싸이 열풍', 둘은 전혀 다르게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전자는 삶의 축이 달라졌음을, 후자는 감수성의 척도가 달라졌음을 증언한다. 이제 사람들은 부(富)를 향한 맹목적 질주에 지쳐 버렸다. 동시에 삶에 대한 새로운 질문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열망이 사회 전체에 인문학을 불러들이고 있는 것이리라.
싸이의 부상 또한 비슷한 맥락을 갖는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마네킹 같은 외모와 몸매를 갖기 위해 안달했다. 하지만 싸이는 생동감과 유쾌함만으로 그 같은 '중독적' 감수성을 간단히 제압해 버렸다.
따지고 보면 그동안은 '플러스의 시대'였다. 부와 미(美)를 증식하고자 하는.
하지만 이제 바야흐로 '마이너스의 시대'다. 앞으론 덜어내는 것이 관건이다. 덜 벌고 덜 쓰고 덜 먹는, 나아가 '존재의 참을 수 없는 무거움'에서 벗어나야 할 때다.
지난해 가을 동의보감 '리라이팅'을 내면서 그 인연으로 이 칼럼을 시작했고, 칼럼을 마칠 때쯤 그 '짝'이 되는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가 출간되었다. 전자가 몸과 우주에 대한 탐구라면, 후자는 몸과 운명에 대한 인문학적 접근이다. 이 칼럼이 두 작업 사이를 매끄럽게 조율해 주었다. 그 덕분에 독자들과의 관계도 한층 두터워졌다. 전국 곳곳에서 칼럼의 애독자라는 분들을 만났고, 그중에는 연재물을 정성껏 스크랩해서 보여준 분도 여럿 계셨다. 학교에서, 감옥에서, 혹은 해외에서 온 독자편지를 받았다. 고마움과 과분함을 함께 전한다.
고전의 스승들은 말한다. "배움만이 기질을 바꿀 수 있다"라고. 기질을 바꾸면 운명이 바뀐다. 거꾸로 배움이 없이 삶을 바꾸기란 불가능하다. 동의보감은 그 원리와 이치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멘토 중의 멘토다. 거기 담긴 '의역학(醫易學)'적 비전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싶었다. 그걸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앎이 곧 길이고 명(命)이다! 모두들 이 길 위에서 앎의 기쁨을 누리시기를, 그리하여 가는 곳마다 운명의 주인이 되시기를!
고미숙 고전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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