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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속으로

산타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

by Ganze 2014. 12. 25.





(행복해지려면 욕심을 버려야 한다고 하셨는데요. 말하기는 쉽지만 실제로는 매우 어려운 것 같습니다. 우리가 실제 생활에서 욕심을 어떻게 버릴 수 있을지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답변
“욕심을 버리기 어려우면 움켜쥐고 괴로워하면 됩니다. 괴로운 것이 심하면 내려놓게 됩니다.

이 물건이 만약에 뜨겁다고 합시다. 내가 이것을 쥐었을 때 어떻게 행동합니까? ‘앗 뜨거워!’ 합니다. 그런데 이걸 쥐고 ‘뜨거워 죽겠어요, 뜨거워 죽겠어요’ 하니 ‘내려놓아라’ 합니다. 그러니 ‘어떻게 내려놓아요? 방법을 알려주세요’ 합니다.

방법을 몰라서 못 내려놓는 게 아닙니다. 이것을 갖고 싶은 욕심 때문에 못 내려놓습니다. 그렇기에 이것을 갖고 싶으면 손을 데여야 하고, 손을 데이기 싫으면 내려놓아야 하는 겁니다.

방법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뜨거운 줄 알면 놓아라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그냥 놓아라’ 합니다. 한문으로 ‘방하착’ 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그래도 자꾸 ‘방법 좀 알려주세요’라고 묻습니다. 그래서 제가 할 수 없이 ‘왼손으로 옮겨라’ 그래서 해결이 됐어요.

왜 진작 이렇게 좀 안 알려줬냐 그러거든요. 뜨거운 것도 해결하고 내가 가지고도 있으니까 해결된 것 같지만 그런데 이젠 또 왼손이 뜨거워요. 또 뜨겁다고 해요. 그러면 무릎 위에 놓아라. 좋은 해결책이에요.

두 손 다 안 뜨겁고 내가 아직 가지고 있고요. 그런데 좀 있으면 무릎도 뜨거워져요. 이런 과정을 거쳐서 결국 다 내려놓게 되면 이것이 과연 좋은 방법입니까? 다 필요 없는 과정이에요. 그러니까 본질을 꿰뚫어야 합니다. 방법을 몰라서 못 내려놓는 게 아니라 놓기 싫은 거예요.

괴롭다고 하면서 움켜쥐고 있는데, 그렇게 갖고 싶으면 괴로움을 감수하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삽니까? 괴로우려고 삽니까? 그게 아니라면 놓아야 되겠죠. 물론 내려놓기 어려운 것을 저도 이해합니다.

담배 피우는 사람이 ‘어떻게 담배를 끊습니까?’ 묻는다면 대답은 간단합니다. ‘안 피우면 된다’입니다. 다 이해가 되시죠?

그런데 이해를 못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담배 피우는 사람들이죠. ‘어떻게 끊어요?’ 그 말은 피우고 싶다는 이야기예요. 의식은 끊어야 된다고 생각하고 마음은 피우고 싶은 거예요. 이것은 습관화되어있는 거예요. 그렇기에 금방 해소가 안 됩니다.

그래서 두 가지 방법을 선택해야 합니다. 첫 번째 방법은 무의식이 놀랄 정도로 강력한 태클을 거는 겁니다.

예를 들면 담배 필터에다 전기 장치를 해서 입에다 대면 팍 충격이 들어가서 그냥 까무러칠 정도로 놀라게 합니다. 이렇게 몇 번 되풀이되면 무의식에서 거부합니다. 이렇게 강력한 충격을 주는 방법이 있습니다.

화를 내거나 짜증내는 것도 잘 안 고쳐지죠. 정말 고치고 싶으면 화 한번 낼 때마다 전파상에 가서 전기 충격기로 몸을 지져버리는 거예요. 다섯 번만 하면 화가 올라오다가도 몸이 벌벌 떨려요. 그런데 ‘그렇게까지 하면서 고칠 필요가 뭐가 있느냐?’라고 생각하겠죠. 그래서 안 고쳐지는 거예요.

두 번째 방법은 꾸준히 하는 겁니다. 의식으로 결정한 것을 3일 만에 그만두지 말고 100일, 1000일 이렇게 지속해야 합니다. 그러면 의식이 무의식화됩니다. 뭐든지 오래되면 습관화되기 때문에 습관화되었다는 건 무의식화되었다는 거예요.

이것은 물리 법칙과 똑같습니다. 물질에는 성질이 있죠. 관성의 법칙 들어보셨죠? 머무르는 물체는 계속 머무르려 하고 움직이는 물체는 계속 움직이려고 한다. 이 물질이 이렇게 온다고 합시다. 이것을 정지시켜야겠어요.

방법은 두 가지예요. 강한 힘으로 막으면 조금 움직이다 멈출 거예요. 두 번째, 작은 힘으로 멈추려고 하면 이것이 한참 와서 멈추게 됩니다. 그러니까 태클을 세게 걸든지 꾸준히 하든지 두 가지 방법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강력하게도 못하고 꾸준히도 못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카르마가 계속 똑같은 방식으로 확대 생산되어 가는 거예요. 변화가 안 일어나니까 못 고친다, 이건 타고났다, 그래서 중국에선 사주팔자다, 인도에선 전생에 지은 거다, 서양에서는 하느님이 한다는 얘기들이 나온 겁니다. 변화가 어려우니까 변하지 않는다고 단정해서 나온 표현들이에요.

그러나 불변하는 것은 없습니다. 카르마는 형성된 거예요. 그러니 변화합니다. 이것을 변화시키려면 오랫동안 형성된 거라 사실 좀 어렵습니다. 어릴 때 형성된 것일수록 더 변화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두 가지 길, 꾸준히 하거나 좀 더 세게 태클을 걸거나 해야 합니다. 그러면 누구나 다 변화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변화를 바라기만 하고 아무런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조금 노력을 하더라도 해도 안되더라 합니다.

그래서 꾸준히 할 것, 좀 더 강력하게 할 것. 그러면 우리는 누구나 다 변화가 가능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지식으로 이해하는 건 의식이 하는 것이기에 아무리 해도 변화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야기를 듣고 눈물이 나고 마음에서 감동이 일어나면 변화가 쉽게 일어납니다. 감동했다는 것은 무의식에 영향을 줬다는 것입니다.”


욕심을 내려놓는 구체적인 방법을 쉽게 설명해주니 청중들도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강연을 마무리하기 전에 Meng-Tan씨가 “오늘 한 가지만 기억하라고 한다면 무엇을 말씀하시겠습니까?”라고 물었고, 스님께서는 화에 관해 마무리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참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화가 난다고 화를 내면 상대방이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그래서 되돌아옵니다. 그러면 나는 더 큰 화가 나기 때문에 확대 생산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가장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두 번째는 ‘그러니 참아라’라고 합니다. 이건 남이 볼 땐 아주 좋아 보입니다. 칭찬을 듣지만 나는 스트레스가 쌓입니다. 지금 현대인들이 주로 이런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것도 좋은 방법이 아니에요.

그러니 참지도 마라. 그러면 어떻게 하란 거냐. 화도 내지 않고, 참지도 말고, 어떻게 하라는 거냐고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조금만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화가 일어납니다. 일어난 화를 낼 거냐, 참을 거냐 두 가지 선택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밑뿌리로 돌아가 화가 일어나는 걸 봐야 합니다.

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화를 낼 필요도 없고 참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 근원을 봐서 왜 화가 나느냐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화가 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순간적으로 무지에 빠집니다. 화가 난다는 것은 무의식에서 시작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의식이 감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늘 자기 마음을 알아차리라는 겁니다. 그러나 놓쳤을 때는 화가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리라는 거예요. 화가 일어나더라도 그것을 알아차리면 확대되지 않고 조금 머물렀다가 사라집니다.

참는 게 아니라 알아차리는 거예요. 다만 지켜보는 겁니다. 이것은 스트레스가 쌓이지 않습니다. 그것마저도 놓쳐서 화를 내버렸다면, 너 때문이라고 타깃을 타인에게로 돌리지 않고 자기를 봐야 합니다.

'아, 내가 놓쳤구나' 이렇게 돌이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 분노가 지속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훨씬 더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스트레스를 억누르고 살지 않고 해소해야 합니다. 보통 드러내는 것을 해소라고 생각하지만 알아차림을 계속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연습이 좀 필요합니다. 조용히 앉아서 명상을 해야 합니다. 호흡을 먼저 알아차리고, 그렇게 해서 자기 마음에 평정심을 유지해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앉아서는 되는데 실제로 사람과 접촉하면 잘 안됩니다. 안되는 게 꼭 나쁜 게 아니에요. 무엇 때문에 안됐는지를 또 알아차리고 다시 또 연습을 해야 합니다. 현장에서 또 실패를 하고 다시 또 연습을 하면서 이렇게 계속 노력하면 완전히 없어진다 까지는 몰라도 80%는 없어져요.

이런 건 충분히 가능합니다. 충분히 더 행복하게 살 수 있고, 훨씬 더 편안하게 살 수 있게 됩니다. 인간관계가 훨씬 더 좋아집니다. 이런 편안한 상태에서 아이디어를 내야 좀 더 창조적이 됩니다. 그렇기에 참는 것보다는 알아차리라는 말씀을 여러분들께 드리고 싶습니다. 좀 더 행복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법륜스님 즉문즉설 강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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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겠습니다. (청중들 박수) 그런데, 부처님을 집에서 모셔도 됩니까?”
“좋을 대로 하세요. 집에다 모셔도 되고, 안 모셔도 되고요. ‘부처님을 집에 모셨다’ 고 하는데, 그건 부처님이 아니에요. 불상이지요. 돌로 깎고 플라스틱으로 만든 상이잖아요. 그렇죠? 불상은 정원에다 모셔도 되고, 법당에다 모셔도 됩니다. 예술작품으로 대해도 되고, 신앙의 대상으로 모셔도 됩니다. 절에 가면 불상이 많잖아요. 그런데 불상을 부처님처럼 생각하고 모시면 비록 나무이던지 돌이던지 상관없이 나한테는 부처님 역할을 하는 것이고, 그것을 예술작품으로 보는 사람에게는 그것은 부처님이 아니고 하나의 조각입니다. 그러니까 집에서 불상을 부처님처럼 모시면 그 앞에서 내 마음이 경건해지는 것이고, 조각으로 모시면 그냥 집안의 장식품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파는 걸 사와도 되고요.
그런데 부처님으로 모시려면 절에서는 점안의식이 있어요. 불상이 부처는 아니기 때문에 부처로 모실 때에는 ‘제가 앞으로 부처님으로 인정하고 모시겠습니다’ 라는 의식을 해야 돼요. 그것을 점안이라고 합니다. 절에서는 그런 전통 문화를 갖고 있어요. 스님들은 그런 전통 문화를 따르지 않으면 그 안에서 왕따를 당하니까 따라야 하지만, 신자들은 집에서 불상을 모실 때 점안을 했는지 안했는지 다른 사람들이 상관을 안 합니다. 그러니까 질문자가 오늘 찬물 한 그릇 떠놓고 삼배하고 ‘오늘부터 내가 당신을 부처님으로 모시겠소’ 한다고 해도 교리에 어긋나는 것이 아닙니다. 천하만물이 본래 다 부처이기 때문이지요. 일체 유심조, 다 마음이 짓는 바이기 때문입니다. 어때요? 이제 좀 자유로워지셨습니까?”
“예, 자유로워졌습니다. 멀리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스님께 합장반배로 인사하며 활짝 웃는 할머니를 보며 청중들도 큰 박수를 보내줍니다. 즉문즉설이 이런 것이구나 가슴에 와닿는 순간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님께서는 오늘 대화 나눈 내용의 요점을 짚어주시면서 ‘인연과보’의 원리를 강조하시고 이렇게 마무리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어떠셨어요, 재미있으셨어요? 요점은 이렇습니다. ‘사물을 긍정적으로 보면 행복도가 높아지고 부정적으로 보면 행복도가 낮아진다‘, ’기대가 높으면 실망이 크고, 기대가 낮으면 만족이 크다‘, 바깥을 바꿔서 나에게 맞도록 하는 방법도 있지만 바깥을 놔두고도 내 마음을 조절해서도 내 행복도를 높일 수 있습니다. 둘 중 하나만 하라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은 바깥을 바꾸는 것밖에 생각을 못하는데, 자기를 조절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마음 바꾸는 것만 가르치면 세상을 외면합니다. 세상을 외면하는 것은 세상의 부조리를 용인하고 기득권을 합리화하게 될 위험도 있어요. 이렇게 되면 종교가 아편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는 것입니다. 양자가 다 연관이 있어요. 수확을 많이 하려면 종자를 개량하는 방법도 있고 밭을 잘 가꾸는 방법도 있듯이 말입니다. 여기서 종자를 개량하는 것은 개인이 수행하는 것이고, 밭을 잘 가꾸는 것이 사회를 좋게 바꾸는 것이죠.
앞의 것을 ‘인’, 뒤의 것을 ‘연’이라고 합니다. ‘인연과보’입니다. 인연이 만나서 변화를 가져옵니다. ‘인’만도 아니고, ‘연’만도 아니에요. ‘인’을 주로 강조하는 것이 종교이고, ‘연’을 주로 강조하는 것이 사회운동입니다. 이것도 한쪽으로 치우친 것이죠. 이 둘이 함께 가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한쪽으로는 수행을 해서 자기를 행복하게 하고, 다른 한 쪽으로는 자기의 재능을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데에 써야 합니다, 이 둘을 함께 가야 해요. 이것을 불교용어로는 ’상구보리 하와중생‘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자기의 행복을 자기가 먼저 만들어나가야 합니다. 누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미국에 온다고, 유학을 온다고, 결혼을 한다고, 한국에 돌아간다고, 늙는다고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에요. 행복은 어느 때나 자기가 행복을 만들 수 있습니다. 젊을 때에는 젊어서 행복하고, 늙어서는 늙어서 행복하고, 미국에 오면 미국에 와서 행복하고, 한국에 가면 한국에 가서 행복할 수 있게, 행복을 자기가 만들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지 주어진 행복은 환경이 바뀌면 다시 불행으로 가는 거예요. 이제 더 이상 남에게 매달리지 말고 스스로 주인이 되어 행복하게 사시길 바립니다. 감사합니다.”

*법륜스님 즉문즉설 강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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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 열두 달 중에 단 하루 섹스를 해야 한다면? 바로 크리스마스 밤이지~!"(영화 '해피에로크리스마스' 중)

"크리스마스가 뭔가요, 먹는 건가요? 24일에 수면제 먹고 잠들어서 26일에 일어날 겁니다."(이모씨·24)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개신교 절기의례인 크리스마스. 그러나 오늘날 한국에서는 '연인들의 기념일'로 통한다. CF의 한 장면처럼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선물을 주고받을 애인이 없는 '솔로'들은 크리스마스에 수면제 복용이나 불쌍한 시선 받기를 강요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크리스마스는 언제부터 연인들의 날이 됐을까.

크리스마스는 1890년대에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개신교 선교의 일환으로 국내에 소개됐다. 1920년대 이후 '모던걸''모던보이'가 서구문화 수입을 선도하면서 크리스마스 문화는 경성의 상업적 도시문화와 함께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1936년 12월25일자 '매일신보'는 '기독교인들의 손에서 상인들의 손으로 넘어간 크리스마스'란 제목의 기사에서 당시 백화점의 '쇼 윈도우'와 '크리스마스 추리'를 언급하며 크리스마스의 상업화를 비판하기도 했다.

크리스마스는 1945년 해방 이후 미군정에 의해 공휴일로 지정됐다. 한국전쟁이 끝난 1950년대 중후반부터 일찌감치 크리스마스는 젊은이들에게 '광란'과 '향락'의 날로 향유됐다. 당시 신문은 1960년대부터 여관이 '초만원'이었다고 증언한다.

강준만 교수는 '한국 크리스마스의 역사: '통금 해제의 감격'에서 '한국형 다원주의'로(2007)'라는 논문에서 "1981년까지 지속된 야간 통행금지로부터의 해방감과 엄격한 반공 이데올로기 체제하에서의 친미의 상징적 가치, 서구화에 대한 열망, 크리스마스 상업주의와 대중문화의 연계효과, 세계와의 일체감, 계절적인 영향으로 한국에서 크리스마스가 최대의 '놀자판 축제'로 발전했다"고 설명했다.

◇상업화된 크리스마스…배제되는 솔로들

초기 종교적 의미나 '통행금지'와 '군사독재'의 억압이 사라진 오늘, '소비주의' 문화의 잔재는 남았다. 주된 타깃은 '커플'이다. 서양에서 크리스마스가 주로 가족과 함께하는 날로 여겨지는 반면 설날이나 추석 등 전통 명절을 지닌 한국에서 성탄절은 연인들끼리 보내는 날로 차별화된 경향이 크다는 분석이다. 대중매체와 각종 상품 마케팅은 크리스마스에 대한 이상적인 이미지를 끊임없이 보급하며 '애인'이나 '금전적 여유'가 없는 이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안긴다.

직장인 김모씨(29)는 애인이 없는 이번 크리스마스를 '술'로 보낼 예정이다. 김씨는 "(남자) 친구들이랑 이태원에 가서 최대한 더럽게 놀 계획"이라며 "낮부터 취해있을 예정이다. 주님을 위한 날에 절 다니는 사람들까지 크리스마스에 커플들끼리 놀러다니는 건 한국의 유난스러운 특징인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 크리스마스는 솔로들이 가장 외로움을 타는 날로 꼽힌다. 결혼정보회사 가연이 솔로 미혼남녀 304명을 대상으로 '1년 중 가장 솔로로 보내기 싫은 때는 언제인가'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크리스마스'(40%)가 1위를 차지했다. '발렌타인데이/화이트데이'(23%), '생일'(15%), '12월31일'(13%)보다 압도적으로 높다.

김미연 듀오 홍보팀 주임은 "12월엔 크리스마스와 파티 등 연인 간 행사가 많아 외로운 남녀의 가입문의 건수가 2배가량 증가한다"며 "실제 듀오가 조사한 결과 미혼남녀 83.5%는 연말 분위기가 연애욕구를 부추긴다고 답했으며 이에 따라 12월엔 '솔로 탈출'을 돕는 다양한 행사를 마련하고 있다"고 밝혔다.

◇'삼포세대'의 달라진 사회 풍경

그러나 이러한 이상화된 '흥청망청' 크리스마스 이미지는 2000년대 이후 녹록치 않은 현실과 큰 간극을 갖는다. 현실 속 '삼포세대(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세대)'로 일컬어지는 젊은이들 대다수는 취업과 생계 전선 속에서 대중매체가 그리는 이상적인 크리스마스를 맞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캐럴 소리가 갈수록 사라지고 크리스마스 기대치가 낮아진다는 분석도 나온다. 시장조사업체 마크로밀엠브레인이 지난 18~19일 직장인 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66.6%가 '집에서 쉰다'고 답했으며 54.4%는 단순 '휴일'로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에서 크리스마스가 점차 축제라기보다 치러야 할 '미션'으로 여겨지면서 솔로뿐 아니라 커플과 가장 등 많은 이들이 부담을 느끼고 있어 의미를 되돌아봐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나온다. 우모씨(32)는 "결혼 초 유부남에겐 크리스마스에 뭘 할지 큰 스트레스"라며 "식당 예약도 꽉 찼고 공연은 다 매진"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빅데이터 분석 전문기업 타파크로스가 지난해 SNS 등 소셜데이터 200만건을 분석한 결과 한국인들의 크리스마스와 관련한 생각 중 '누구와 보낼지' '무엇을 할지' '무엇을 선물할지'에 대한 고민이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연인들은 특별한 데이트를 고심하고 솔로들은 새로운 인연을 찾아 소개팅을 하거나 고백을 하는 등 '준비'를 한다는 설명이다.

한 현직 교회 전도사는 "축일에서 축제의 대상이 빠지고 세속화되면 자연스럽게 소비적 문화가 된다. 밸런타인데이나 할로윈데이도 마찬가지"라며 "이를테면 산타클로스도 성 니콜라스가 가난한 자들을 돌보며 선물을 주던 것에서 유래했는데 그 정신이 빠지니 연인들이나 자식들이 선물을 요구하는 등 본질이 퇴색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우석훈 경제학자는 "서구의 크리스마스가 결코 떠들썩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가족행사의 의미를 띄는 데 비해 한국은 유독 연인들끼리 보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강하다"고 분석했다. 이어 "실제 애인 없는 사람들이 반 이상이고 갈수록 가족이 없는 이들도 많아 현재 크리스마스는 한국에서 가장 소외감을 느끼기 쉬운 날이며 파편화된 개인들이 상업성에 가장 많이 노출되는 시간이 됐다. 꼭 종교적인 의미가 아니더라도 나눔과 사랑이라는 축제 본연의 공동체적 성격을 환기시키고 돌아봐야 한다"고 말했다.

< 머니투데이 기사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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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 세계는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욕구에는 세 가지가 있어요. 첫 번째는 생존적 욕구입니다. 배고프면 먹으려고 하고 졸리면 자려고 하고 추우면 따뜻한 곳을 찾고 더우면 시원한 곳을 찾는, 이런 것을 생존적 욕구라고 해요.

이것을 사회적 용어로 표현하면 ‘기본적 욕구’라고 해요. 기본적 욕구는 충족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충족이 안되면 인간에게는 고통이 따르는데 이것은 생존에 위협을 받기 때문입니다. 사회적으로도 이런 기본적 욕구는 보장해 주어야 합니다.

다음으로는 상대적 욕구입니다. 더 맛있는 것을 먹고 싶다, 남보다 더 많이 갖고 싶다, 더 높은 지위에 올라가고 싶다, 더 좋은 옷 입고 싶다, 더 편하고 싶다, 이것은 상대적인 욕구입니다.

그러나 이런 상대적인 욕구는 끝이 없어요. 비교에 의해서 생기는 문제이기 때문에 어느 선까지라고 정해질 수가 없는 거예요. 내가 10만 불을 가졌을 때 주위가 다 1만 불 밖에 안 가지고 있으면 만족을 해요. 그런데 주위가 다 100만 불을 갖고 있으면 내가 굉장히 가난한 게 됩니다. 그래서 다시 100만 불을 갖는다고 해도 다시 주위가 1000만 불을 갖고 있으면 나는 역시 빈곤한 것이 됩니다.

GDP가 4만 불이 되고 10만 불이 된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에요. 이것은 항상 비교에 의해서 일어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행복도를 높이는 방법은 두 가지예요. 첫째는 사회제도적으로는 빈부격차를 줄여주는 것이고, 둘째는 개인의 기대치를 낮추면 만족도가 높아집니다. 그래서 가난한 나라 중에서도 행복도가 아주 높은 나라가 있습니다.

상대적인 욕구는 절제를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끝까지 욕구를 따라가봐야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선에서 스스로 절제할 줄 알아야 하고, 사회제도적으로도 빈부격차를 줄여주어야 합니다.

세 번째 욕구는 과욕입니다. 만약 과식을 했다면 입은 만족할지 모르겠지만 몸에는 나쁘잖아요? 과음을 했다, 과로를 했다, 이것은 다 자기를 헤치는 겁니다. 개인은 과욕을 버려야 하는 것이고, 제도적으로는 과욕을 부리지 못하도록 규제를 해야 합니다.

이 과욕을 세상에서는 ‘탐욕’이라고 부릅니다. 상대적 욕구는 ‘욕망’이라고 부릅니다. 생존적 욕구는 ‘기본 권리’라고 부릅니다.

‘기본 권리’는 보장해야 하고 ‘욕망’은 절제를 해야 하고 ‘탐욕’은 규제를 해야 합니다. 그런 기준에서 질문자가 탐욕을 부렸다면 버려야 하고, 욕망을 쫓았으면 절제를 할 줄 알아야 하고, 기본적 욕구의 문제라면 그것은 오히려 보장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지금 질문자가 욕망을 쫓다가 그걸 버리니까 무기력해졌다 하는 것은 아직은 마음으로는 과욕이나 욕망을 쫓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마음으로는 쫓고 있는데 현실은 멈추니까 뒤처진 것 같은 기분이 드니까 어떻게 해야 되나 망설여지는 거예요.

담배를 피울 때는 어느 담배가 더 맛있느냐, 술을 마실 때는 어느 술이 더 좋으냐 하면서 그걸 갖고 신분이 높다는 것을 과시했지만, 술이 나쁘고 담배가 나쁘다는 것을 알았다면 딱 끊어버려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걸 끊어도 과거의 습관이나 가치관을 못 버리면 다른 사람이 좋은 담배를 피우거나 좋은 술을 먹을 때 나만 세상에 뒤처진 것이 아니냐 이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이것은 아직 가치관의 전환이 오지 않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허전해지고 방황하는 겁니다. 비록 생각은 바뀌었을지라도 아직 습관은 남아있기 때문에 지금 그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욕심으로 바쁘게 사는 게 좋으면 다시 일어나서 따라가면 되지 앉아서 부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큰 집에 가면 쓱 둘러보고 ‘아이고, 청소하기 힘들겠다’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큰 것이 좋은 게 아니에요. 그러나 큰 것이 좋다는 생각을 못 버리면 계속 소비를 늘리게 돼요. 그래서 지구환경까지 오염시켜서 같이 지구 멸망의 구렁텅이로 나아가고 있는 겁니다.

소비에는 중독성이 있습니다. 이런 소비 중독은 마약보다 더 무서운 겁니다. 이 소비주의가 그 어떤 것보다 인류를 위협하는 첫 번째 사안입니다. 계속 차를 바꾸거나, 집을 넓히거나, 이래야 살아있는 기분을 느끼는 겁니다. 골프를 치러 외국으로 가야 된다든지, 명품 브랜드 가방을 사야 된다든지, 그래야 만족이 되지 안 그러면 뭔가 허전하게 느껴집니다.

이런 식으로 과소비로 계속 흘러가면 폐기물이 엄청나게 많이 나오게 되어 환경오염이 심각해지죠. 그런데 이것은 멈춰지지가 않습니다.

과연 누가 이것을 멈추게 할 수 있겠느냐. 이게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마지막 남은 희망이에요.

오늘날 기독교도 이미 완전히 소비주의에 중독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주님이 아니고 돈이 주님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돈의 양으로 표시되지 않습니까. 교회가 크고 신자가 많고 수입이 많은 것이 은총의 징표가 되었어요. 또 여러분이 부처님의 가피를 입었다는 것도 다 돈으로 표현되잖아요.

이건 우리들 전체가 다 안고 있는 문제예요. 이 소비주의에 중독되어 우리 모두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뒤처지면 나 혼자만 낙오자가 되는 거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죠. 이렇게 소비주의가 질주하고 있는 현 상태에서 자신이 거기에 따라가려니 지치고 헐떡거리고, 그러지 않으려고 멈추니까 낙오자 같은 이런 심리예요.

이건 별다른 처방책이 없지만, 이렇게 생각하면 도움이 돼요. 이렇게 더 많은 소비를 향해 질주를 하면 맨 마지막은 어디에 도달할까요? 앞서거니 뒤서거니 서로 경쟁하면서 달리다 보면 맨 끝은 뭘까요? 바로 낭떠러지입니다.

빨리 갈수록 빨리 죽는 거예요. 끝이 낭떠러지인 줄 알면 빨리 가는 게 별로 부럽지가 않아요. 그런데 질문자는 끝이 낭떠러지인 줄 지금 모르고 끝이 천국인 줄 알기 때문에 따라가려니 헐떡거리고 가만히 있으려니까 뒤처지는 것 같고, 그래서 생긴 고민입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빨리 가봤자 낭떠러지다’ 이것을 늘 생각하세요. 스님은 그 끝이 낭떠러지인 줄 알기 때문에 빨리 가는 사람들에 대해서 별로 안 부러워요. 때로는 불쌍하게 느낄 때도 있어요. 그러나 자기가 좋아서 가는 거니까 어쩌겠어요.”


답변이 끝나자 질문자가 활짝 웃으며 “고맙습니다.” 인사를 하니 청중들은 뜨거운 박수를 보내줍니다. ‘끝이 낭떠러지인 줄 몰라서 그랬구나’ 알게 되니 마음이 싹 가벼워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법륜스님 즉문즉설 강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