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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속으로

공부의 배신 1

by Ganze 2017. 4. 27.

지금까지 그리고 아직까지 대한민국의 영재 또는 천재,수재라는 호칭은 교과과정 내용이나 특정학문 내용을 아주 잘 기억하거나 잘 재현하는 능력치에 부여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선천이든 후천이든 상관없이.
하지만 2016년, 서울에서 있었던 인간 이세돌과 구글의 인공지능 알파고의 세기의 바둑대결은 이 호칭에 대한 가치의 종말을 전세계에 알린 대사건이었다.
소위 창의적인 해석이나 비평없이 배운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진기억력이나 필기력에 좌우되는 시험과 평가 시스템이 이제는 거대한 사회전반의 변화와 흐름 앞에 그 힘을 다 했다는 것이다.
알파고 같은 딥러닝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외우고 계산하고 재현하는 것을 더 효율적이고 빠르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공부를 잘한다 못한다 가 아니라
독창적이며 동시에 공감할 수 있는
자신만의 쟝르와 컨텐츠를 만들어 낼 수 있느냐 없느냐로 능력을 평가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베끼지 않은 새로운 쟝르의 학문적인 집 그리고 거기서 창안하고 살을 붙인 자기 IP를 완성해내지 못하면 개인과 국가는 생산과 발전의 원동력이 사라져서 국가체제가 무너지고 만다.
겁주는 게 아니다. 지극히 현실적인 코멘트이다.
이런 기초체력이 약한 대한민국의 학문과 교육 구조에서 어떻게 국가경제의 튼튼한 하체역할을 하는 개개인의 창의력이 탄생될 수 있겠는가?

다가올 시대는 지적재산(IP)의 시대라고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한결같이 말하고 있다.
한 명 한 명의 창의력이 벤처,강소기업을 만들고 이것들이 중견기업이 되고, 대기업이 되고, 글로벌 기업으로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이미 변화는 시작됐다.
부정하든 안하든 여기저기에서 개인의 성향과 기호에 따른 창의적인 쟝르와 컨텐츠를 교육의 현장에서 적용하고 실험하는 곳이 생겨나고 있다.

글쎄...기득권을 대물림하기 위해 돈과 공을 무지하게 들인 누군가에게는 위로의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여러 학원을 다니고 잠을 줄여가며 외우고 줄긋고 동그라미 치던 그런 구시대적인 공부는 멈춰야 한다.

​​자기 집을 짓지 못하는 자들이 모든 기초 및 응용 학문분야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대한민국 교육계의 슬픈 현실을 이젠 끝장내야 한다.

제발 이제는
"선생님, 저는 궁금한게 없는데요 그냥 수업 듣는게 좋은데요..."
"진도 나갑시다. 따로 와서 질문하세요"
이런 교육 아닌 교육, 배움 아닌 배움, 공부 아닌 공부는 쫑 내자구요~!!

어떤 다른 나라의 시끄러운 도서관과
우리나라의 조용한 도서관의 장면이
서로 대비되며 떠오른다.

수업을 하다 자꾸 질문한다고
짜증내거나 인상쓰지 말고
다양한 생각과 발언들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교실 풍경을 그려본다.

"너의 이론은 무엇이니?"
"너는 그렇게 해석을 했구나!"

*비빔 박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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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정답이 정해진 것만 가르치고, 정답이 정해진 것만 질문한다.
'정답이 정해진 질문'만 하는 것은 주인을 키우는 교육이 아니라 노예를 키우는 교육이다.

*이범 (교육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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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래프 진짜예요?"

MIT 미디어랩은 한 대학생에게 검사 장치를 붙이고 일주일 동안 교감신경계가 언제 얼마나 활성화되는지 기록했다. 교감신경계가 활성화된다는 것은 각성, 집중, 흥분, 긴장 등이 증가된 상태를 의미하고, 반대로 불활성화된다는 것은 각성이 거의 없는 상태, 좀 과하게 표현하면 멍하니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 그래프를 들여다보면, 학생이 실험을 하거나 숙제를 하거나 공부를 할 때는 교감신경계가 활성화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잠을 잘 때 교감신경계가 활성화되기도 하는데 이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는 경우이거나 꿈을 꾸는 경우다.
이와 대조적으로, 학생이 TV를 볼 때는 교감신경계가 불활성화된다. TV가 엄청난 분량의 시청각적 자극을 주는 것 같지만 실제로 우리 교감신경은 자극을 거의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러니 TV는 바보상자라 불릴 만하다.
그런데 교감신경계가 불활성화되는 경우가 또 하나 있다. 다름 아닌, 학생이 수업을 받을 때. TV를 볼 때와 비슷한 정도로 교감신경계가 불활성화된다. 수업을 받고 있는 학생들이 잠을 잘 때보다도 더 멍한 상태에 빠져 있다니!
이 실험을 이끈 마주르 교수는 그 원인을로 수업 방식을 꼽았다.
"이 실험에서 학생이 받은수업은 교수가 지식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방식의 수업이었습니다. 이런 방식의 수업에서는 학생들이 제대로 배우지 못합니다."
누군가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수업의 교수가 설명을 잘 못해서 학생이 도저히 집중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유창하게 잘 설명하는 교수의 수업이라면 그래프의 선이 요동치지 않았을까?
이를 예상했다는 듯 마주르 교수는 또 하나의 실험 결과를 보여 주었다.
아이오와 주립대 심리학과 샤나 카펜터 교수의 연구팀이 실시한 실험이었다. 학생들을 두 집단으로 나누어 각각 다른 영상을 보여 주었는데, 하나는 교수가 자신 있는 태도로 학생들과 눈을 맞추며 유창하게 말하는 수업 영상이었고, 다른 하나는 교수가 소극적 태도로 책에 코를 박은 채 어수룩하게 말하는 수업 영상이었다. 수업의 내용 자체는 동일했다.
영상을 다 본 학생들에게 자신이 수업 내용을 어느 정도나 기억하리라 예상하는지 물었다. 유창한 수업 영상을 본 학생들이 예상한 정도는 어수룩한 수업 영상을 본 학생들이 예상한 정도보다 약 두 배 더 높았다.
그런데 막상 시험을 치러 보니 뜻밖의 결과가 나왔다. 실제로 두 집단이 수업 내용을 기억하는 정도는 큰 차이가 없었다. 유창한 수업이든 어수룩한 수업이든 학생들이 그 내용을 이해하고 기억하는 정도는 엇비슷하게 낮았다.
지식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방식의 수업, 학생들이 교사가 말하는 내용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수업이라면, 그 교사가 말을 잘하는지 못하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러나저러나 어차피 학생들의 학습 효과는 낮으므로, 문제는 일방적 수업 그 자체이지 교사의 말솜씨가 아닌 것이다.
마주르 교수의 강연을 듣던 사람들은 두 실험 결과에 적잖이 놀라워했다. 청중의 반응을 보며 마주르 교수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마치 이렇게 묻는 듯했다.
"자, 여러분, 이래도 지식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수업을 계속하시겠습니까?"

*이혜정 저, '대한민국의 시험' 내용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