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타’라는 유명한 영화가 있다. 거기에는 주제음악의 제목이기도 하면서 의미심장한, 그러나 매우 단순한 대사가 나온다. “나는 당신을 봅니다(I see you).” 이는 내 앞에 있는 당신을 시각적으로 감지한다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나비족’들은 이 간단한 표현 안에 사랑한다는 뜻도 담고 경이롭게 존경한다는 뜻도 담는다. 비록 외부인이더라도 나비족의 전사로 다시 태어나 일체감을 보여준 사람에게 그렇게 말한다. 인격의 근본 토대와 그 전체성의 차원에서 소통하고 합일하는 어떤 경지가 도래할 때 하는 말로 들린다. 순수한 인격의 시적(詩的) 승화이다.
궁금증이 생겼다. 왜 “나는 당신을 봅니다”라는 말을 “I look at you”라 하지 않고 “I see you”라고 했을까. 나처럼 영어 실력이 많이 부족한 사람이나 가질 법한 궁금증이다. ‘look’은 의도를 가지고 목표물을 응시하는 행위다. 이와 달리 ‘see’는 그냥 눈에 들어오는 대로 받아들이는 행위이다. ‘see’는 ‘look’에 비해서 보는 사람의 주관적 편견이나 의도가 많이 제거되어 더 전면적이고 개방적이다. 한자 문화권의 언어 습관에서 보면 ‘look’은 ‘시(視)’에 해당되고, ‘see’는 ‘견(見)’에 해당된다. 다시 만날 것을 기대하는 인격적인 표현이 영어로는 ‘see you’이고, 중국어로는 ‘再見’임은 당연하다.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면서 인격적인 개방성과 전면성을 약속하지 않는다면 그저 피상적인 대면 이외에 무엇이 되겠는가. ‘look’과 ‘시(視)’는 어쩔 수 없이 주관의 폐쇄적 편견과 가치 기준 그리고 일방적인 신념을 허용하게 된다. 그래서 넓고 높은 인격들은 ‘see’와 ‘견(見)’의 보기를 한다.
“어떻게 할지 남에게 물을 게 아니라 무엇을 원하는지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집단 중의 한 명이 되도록 내몰리는 상황에서 벗어나 자존감과 민감성을 회복한 뒤에야 비로소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16일 오전 서울 종로구 건명원 한옥 강의실에서 마주 앉은 그에게 우선 최근 비선실세 국정 농단 사태에 대한 생각부터 물었다.
“후진국형 비리 사건, 각종 참사와 재난이 거듭 일어나는 것 자체도 문제지만 그런 일을 처리하면서 뚜렷한 교훈과 변화를 얻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되는 게 더 심각한 문제다. 이번 국정 농단 사태는 우리 사회의 가치관이 어느 정도까지 퇴행했는지 보여준다. 정신적 구조 전반이 붕괴 위기에 몰려 있다고 봐야 한다.”
관련자 책임을 밝히고 처벌하는 외연적 처리만으로 지나간다면 앞으로 유사한 비극이 끊이지 않으리라는 경고였다. 그는 “우리 사회 구성원들은 그동안 눈앞에 벌어진 불합리, 부조리, 부도덕에 훌륭히 저항하고 극복해 왔다”며 “그럼에도 ‘극복 이후’에 거의 언제나 한층 더 악화된 상황을 맞아야 했다”고 지적했다.
까닭이 뭘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태, 충분히 예견된 사고를 피하기 위해 미리 움직이는 민감성을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 곳곳에는 각양각색 ‘일상의 최순실’들이 오래전부터 무수히 뿌리박혀 있었다. 그런 현실을 자각하고 혁파하려는 노력이 절실하다.”
과연 가능할까. 옳은 말이라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의혹이 일었다. 반문하는 기자에게 최 교수가 꾸짖듯 답했다.
“가능할까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건 관찰자적 시각이다. 1인칭 시각에서 질문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가능성’ 대신 ‘선택’이 남는다. ‘할래, 안 할래?’가 되는 거다. 지금처럼 계속 가면 공멸뿐임을 각성하고 눈앞의 편리함이나 이익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
다시 한 소리 들을 걸 각오하며 그가 못마땅해 할 물음을 던졌다. 눈앞의 사익을 위해 타인의 손해와 위험을 외면하는 세태가 보편화된 사회에 그런 품격을 기대할 수 있을지. 어쩌면 우리 사회는 ‘양보하면 밀려난다’는 조바심에 이미 뼛속 깊이 길들여진 게 아닐지.
“동의한다. 나 역시 우리 공동체의 가치관이 회복 불가능한 지경으로 망가졌다고 본다. 그러나 다른 선택이 없다. 지금 변화하지 못하면 역사상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치욕을 당할 위험이 크다. 천천히 덥혀지는 물 속에 앉은 개구리의 무심함을 경계해야 한다.”
책에서 최 교수는 민감한 지성을 가진 리더의 역할에 대해 강조했다. 한국 사회는 이런 지성의 경고를 입에 쓴 약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런 리더의 출현을 바랄 수 있는 걸까.
“역사를 움직이고 사회를 도약시키는 건 합리적 과학적 분석 너머의 에너지다. 창의성을 말살하는 교육 시스템부터 바뀌어야 한다. 지금의 한국 사회는 자신의 고유한 가치와 재능을 사랑하는 능력이 퇴화된 사람들의 사회다. 내가 나로서 살고 있는가, 타인의 꿈이 아닌 ‘내 꿈’을 꾸고 있는가, 다른 사람의 생각을 내 생각으로 착각하고 있지 않은가. 그 답을 스스로 찾는 데서 모든 희망이 출발할 거다.”
*동아일보, 최진석 교수 인터뷰 기사 중에서
-------------------------------
세상에 없던 수업, 우리가 기다려온 통찰!
철학 없는 시대를 위한 최진석 교수의 생각 혁명
시선의 높이가
삶의 높이다
우리 사회는 개인의 삶으로도, 국가적으로도 지금 전진과 후퇴의 경계선에 서 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 한탄했던 비주체적이고 비독립적인 1925년의 조선과 2017년의 대한민국은 달라진 것이 없다. 선진화로의 상승은 고사하고 민주화 이전의 단계로도 역행하는 형상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는 철학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궁극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철학은 문명의 끝에 자리하여 우리가 걸어온 삶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철학은 단순히 지식을 습득하는 전술적인 차원에 머무르지 않는다. 시대의 흐름을 읽는 시선을 통해 전략적인 차원으로의 상승을 이끌며 기능적인 대답에서 벗어나 스스로 주체적이고 인격적인 질문을 던지게 한다. 주위의 자극에도 흔들리지 않는 온전한 나를 찾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획득한 생각의 높이는 시선의 높이를, 시선의 높이는 활동의 높이를, 활동의 높이는 다시 삶의 수준을 상승시키며, 이는 결국 국가의 수준을 결정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철학적 사유를 통해 인문적, 지성적, 문화적, 예술적 차원으로의 선진화를 이루어야 한다. 이는 서양 주도의 세계에서 동양이 어떻게 가치를 회복할 것인가와도 궁극적으로 밀접한 관련이 있다.
철학은
국가 발전의 기초다
진정한 의미의 철학은 ‘부정(不定)?선도(先導)?독립(獨立)?진인(眞人)’의 네 단계를 통해 현실 속에서 구체화된다. 즉 기존의 것을 철저히 ‘부정’하고 창의력과 상상력으로 시대의 흐름을 ‘선도’하며 기존의 것과의 불화를 자초하는 용기를 통해 종속적인 나에서 ‘독립’해 주체적인 나를 회복함으로써 자신만의 진리를 구성하는 참된 나, 즉 ‘진인’을 이루는 것이다.
본래 서양의 학문인 철학은 서양이 세계를 바라보는 전략적 시선의 합으로, 이러한 철학이 동아시아에 진입한 것은 산업혁명 이후 서양의 제국주의 역사와 관련이 깊다. 동양에 대한 서양의 완전 승리를 의미하는 첫 사건인 1840년 아편전쟁을 시작으로 1860년 베이징조약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동양을 패배시킨 서양의 힘이 어디서 오는지 꾸준히 관찰한다. 구국구망(救國救亡), 즉 조국과 민족을 모두 구해내기 위한 방법으로 서양학습(向西方?習)을 택한 것이다.
그 시작으로 서양의 대포와 군함을 핵심으로 한 과학기술을, 다음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 정치제도를 받아들였으나 종래에는 그 배후의 힘이 문화, 윤리, 사상, 철학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이를 서양의 것으로 일순간 바꾸어버린다. 문화, 윤리, 사상, 철학이야말로 국가를 지배하는 가장 높은 시선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철학이란 인간 개인의 독립적인 삶을 넘어 한 국가의 선진을 결정하는 핵심적인 기준이 된다. 중국이 철학을 통해 서양을 증오하는 것에서 나아가 전략적으로 극복하고자 한 것처럼 우리 또한 지금의 대한민국을 분노의 대상이 아닌 전략적으로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 이유가 철학 속에 있는 것이다.
배우는 철학에서
생각하는 철학으로
지금까지 우리는 한번도 진정한 의미의 철학을 한 적이 없다. 철학은 보통 명사와 같이 쓰이지만 동사로 작동할 때만 진정한 의미를 갖는다. 이제 우리는 철학자들이 남긴 내용을 단순히 숙지하는 ‘배우는’ 철학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철학은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태어난 것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직접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적인 세계를 배재한 철학은 진정한 의미의 철학이 아니며 이러한 이론으로서의 철학을 진리인양 믿는 것, 나아가 철학을 직접 생산하지 못하고 수입한다는 것은 곧 생각을 수입한다는 것과 같다. 그리고 생각의 종속은 가치관뿐 아니라 산업까지도 포함해 삶 전체의 종속을 의미한다. 즉 철학이란 자기 스스로 삶의 격을 결정하고 실천하는 것, 한마디로 탁월한 사유의 시선을 갖는 것이다.
해를 해로만 보거나 달을 달로만 보는 분열된 삶에서 벗어나 해와 달을 동시에 장악하는 활동성[明]을 통해 아직 이름 붙지 않은 곳[苑]으로 건너가는 도전을 하는 것이야말로 기존의 것을 답습하는 훈고(訓?)적 기풍에서 벗어나 창의적 기풍을 생산하는 선진화의 길로 나아가는 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철학을 배우는 것에서 생각하는 것으로 이동시키는 첫 시도며 개인, 더 나아가 사회가 철학적 시선을 갖도록 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
*최진석, '탁월한 사유의 시선' 서평 중에서
-------------------------------------
어른이 되는 과정을 부모 아래의 밝고 따뜻한 세계에서 벗어나 고통스럽게 껍질을 깨고 세상 밖으로 나오는 힘든 여정으로 표현한 이 책은 자기 안의 목소리를 듣는 것, 그 목소리가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서두에 이미 밝히며 시작한다. 그 여정은 곧 자기 자신을 찾는 것, 내면의 성장을 의미한다. 주변의 목소리가 아닌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은 단순히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하는 어린아이 같은 걸 뜻하지 않는다.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을 찾는 일인 것이다. 그 과정 속에서 주인공 싱클레어는 방황하고,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가기도 하며 시행착오를 겪는다. 하지만 데미안이나 피스토리우스처럼 조언해 주는 인도자와 자신이 꿈꾼 이상형을 좇으며 한걸음 한걸음 자신을 찾아간다. 그리고 결국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본다. 자신의 친구이자 인도자인 데미안과 똑같이 닮아 있는 자신을.
*헤르만 헤세, '데미안' 서평 중에서
----------------------------------
아이러니하거나 독설로 들릴지 모르지만
'계속 배우기만 하는 것을 멈춰야 합니다.'
배우기만 하면 지식의 울타리를 치는 것과
같습니다.
배운 것은 즉시 써먹어야 하고 그것을
밑천으로 스스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배운 것을 알아주는 자리,직장, 돈벌이를 찾아
다니지 마시길 바랍니다.
배움은 그 즉시 화석이 되고 맙니다.
그 즉시 불통과 독단의 울타리가
주위에 쳐집니다.
조직과 관계 속에 있어도 더 불안하기만
합니다.
배우면 즉시 스스로 사용할 곳을 찾아
움직이시길 바랍니다.
혼자됨의 두려움 때문에
무리나 관계로 자꾸만 숨지 마세요.
어머니의 뜨개질같은
인고의 시간들이 흔들리지 않는
인격의 깊이를 만들어 줄 것입니다.
스스로 인격의 품이 넓고 깊어진
자아만이 자신의 내면을 끊임없이
들여다 볼 수 있으며 비로소 타인에 대한
배려도 가능해집니다.
나의 실천이 나의 배움이 되는 경지에
다다를 때, 비로소 울타리는 길과 경계의
또 다른 출발점이 되고
진기한 보물이 숨겨져 있을지 모를
길섶이 될 것입니다.
*Azzurro
'세상속으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간사회 트윈픽스 1-공감 자아와 무공감 자아 (0) | 2017.02.02 |
---|---|
상식을 펼치는 나라, 상식을 감추는 나라 (0) | 2017.01.26 |
2017년엔 이 땅에 따뜻하고 좋은 기운이 퍼지기를~ (0) | 2016.12.29 |
대한민국에 전에 없던 다른 인식의 창문이 열렸다 (0) | 2016.12.17 |
거짓 현실에서 깨어난 대한민국 국민 (0) | 2016.1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