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날 때를 알지 못하고 권력에 집착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면 그 고위(孤危)함에
마음이 절로 무거워진다.
하지만 이렇게 권력을 통해 인간을 읽는 과정을 통해 독자는 인간을 더 깊이 있게
이해하게 되며,
나아가 더 밝은 역사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시대를 넘어 18세기 궁중사를 읽어야 하는 의의를 여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도세자 죽음의 진실을 밝히다!
조선의 르네상스, 그 뒤에 감춰진 광기의 그림자
2011년 1월, 네이버 문학동네 카페(http://cafe.naver.com/mhdn)에서 ‘우리 시대의 명강의’라는 기치 아래 인문학 강의로는 최초로 정민 한양대 교수, 정병설 서울대 교수,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의 인터넷 연재가 시작되었다. 일방향적 정보 전달 방식과 제한된 저자와 독자 간의 소통 방식을 벗어나 매주 업데이트되는 연재글을 기반으로 실시간으로 소통이 이루어졌고, 독자들과 함께하는 지적 탐험이 계속되었다.
‘우리 시대의 명강의’ 중 매주 수요일 연재된 정병설 교수의 ‘권력과 인간’은, 사도세자 죽음이라는 소재를 중심으로 18세기 궁궐사를 꼼꼼히 읽어나가 많은 독자가 ‘역사 인식의 틀’을 넓힐 수 있게끔 이끌었다. 총 48회로 진행된 ‘권력과 인간’은 2011년 12월, 그동안 인문학 강의에 목말랐던 독자들의 갈증을 채워주며 조회수 4만 2천여 회, 댓글 수 5천 개 이상의 기록을 남기며 성공리에 끝났다. 또한 연재 중반인 2011년 6월, 정병설 교수는 총 6회에 걸쳐 ‘EBS 평생대학-역사이야기’에서 같은 주제로 강연을 진행해 일반 대중에게도 사도세자 죽음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연재글을 기본 토대로 하여, 새로운 자료의 반영, 연재 과정에서 발견된 몇 가지 오류의 수정, 깊이 있는 독서를 돕는 보충수업의 집필 등 후속 작업을 통해 연재보다 좀더 단단해진 글로 출간된 [권력과 인간]은 독자를 18세기 궁궐 안으로 초대한다.
역사적 진실은 사료로부터 나온다. 역사의 진실을 캐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사료를 정확하게 읽는 것이 진실 규명의 시작이자 끝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사료를 오독하지 않고 정확하게 읽어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서로 모순되거나 엇갈리는 주장을 펼치는 사료들의 진위를 가늠할 수 있는 눈이다. 그 눈으로,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공적이고 사적인 여러 기록에서 윤색되거나 왜곡되어 덧씌워진 것들을 걷어내야 한다. 또한 자신의 역사관이나 이데올로기로 그 눈을 가로막지 말아야 한다. 이를 통해서만 역사 속 사건의 실체에 다가설 수 있으며 그렇게 규명된 진실 속에서 권력과 인간의 모습을 정확히 볼 수 있게 된다.
왜 아버지는 아들을 죽였을까?
2010년, [한중록](문학동네)을 통해 혜경궁 홍씨에게 씌워진 ‘악녀’라는 오명을 벗기고, 사도세자의 죽음의 진실에 한 발 다가서는 가이드가 되어준 정병설 교수는 [한중록]을 주석·번역하면서 몇 가지 의문을 품게 되었다고 한다. “어떻게 이렇게 일차적인 해석도 잘못되고 사실관계도 맞지 않는 논거를 토대로 학문적 가설이 나올 수 있었을까? 어떻게 몇 명이 계속 잘못을 증폭해가며 그릇된 학설을 정착시킬 수 있었을까? 왜 학계에서는 지금껏 그것을 제대로 검증하지 않았을까?”
아버지 영조가 아들 사도세자를 죽인 임오화변(壬午禍變)은 조선시대, 아니 한국사를 통틀어 전무후무한 사건이다. 그렇기에 사도세자의 죽음은 [이산] [성균관 스캔들] [영원한 제국] 같은 드라마, 영화, 소설로 끊임없이 재해석·재생산되며 일반 대중에게도 익숙해졌다. 하지만 이렇게 대중적으로 알려진 사도세자의 죽음은 정작 학문으로 심도 깊게 논의되지 않았다. 사도세자가 미쳤다 하여 영조가 그를 죽일 수밖에 없었다는 ‘광증설’과 우수한 자질을 가진 사도세자가 약소 당파를 편들다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당쟁희생설’ 정도의 논의가 있었으나 두 가지 설 모두 제대로 된 근거자료가 뒷받침되지 못한 그저 단순한 견해에 그쳤다. 이렇게 제대로 된 학문적 논의가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출간된 [권력과 인간]은 ‘광증설’과 ‘당쟁희생설’ 사이에서 우리가 그동안 오독해온 사도세자의 죽음을 다각도로 분석하고자 한 첫 성과다.
애통은 애통이고, 의리는 의리라.
정병설 교수는 결론적으로 사도세자가 미쳐서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영조를 공격하려다가 반역죄에 걸렸다는 [한중록]의 설명을 따르지만, [한중록]만이 진실이라고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는 않는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를 비롯해 [이재난고] [현고기] [대천록] 같은 각종 사찬 역사서, 개인 문집 등 다양한 사료를 활용해 폭넓은 관점으로 사도세자의 죽음을 분석·고찰해 진실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노력한다.
그는 우선 사료의 검토를 통해 사도세자에게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다는 결론을 내린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세자는 타고난 성품이 탁월하여 임금이 매우 사랑했다. 그런데 열 살이 넘어서자 점차 학문을 게을리했고, 대리청정을 한 다음부터 병이 생겨서 본성을 잃었다(疾發喪性). 처음에는 대단치 않아서 신민(臣民)들이 낫기를 바랐다. 1757년과 1758년 이후 병증이 더욱 심해져 병이 발작할 때에는 내인과 환관을 죽였고, 죽인 후에는 바로 후회하곤 했다”라고 기록했다. 이외에 영조는 사도세자를 세자 지위에서 내리면서 쓴 「폐세자반교」에서 “비록 (사도세자가) 미쳤다고는 하지만, 어찌 처분을 하지 않으리오(雖曰狂何不處分)”라고 하였고, 세자 본인도 장인인 홍봉한에게 보낸 편지에서 “제가 본래 다른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하는 울화증이 있는데, 지금 더위까지 먹어 임금을 뵙고 나오니, 울화가 더욱 극하여 미친듯이 괴롭습니다”라고 자신의 병에 대해 밝혔다.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사도세자를 지켜본 혜경궁 또한 [한중록]을 통해 세자의 병증을 치밀하게 그려냈다. [한중록]에 따르면 사도세자는 아무 옷이나 입지 못하는 의대증에 걸렸고, 충동을 통제하지 못하여 사람을 때리고 죽이는 가학증도 점점 심해졌다. 처음에는 내관이나 내인을 향한 폭력이 후궁이나 아내, 심지어는 생모 선희궁과 부왕 영조에게까지 칼끝이 향했다. 이런 상황을 더이상 좌시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단순히 미친 것이라면 치료를 하거나 보호하여 감시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영조는 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방법을 택한다. 단순히 세자가 미쳤다는 이유만으로 죽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자가 뒤주에 갇히기 한 달 전, 나경언이 세자가 역모를 꾀한다는 고변을 올렸다. 영조는 세자를 얕보았기 때문에 그가 무엇을 결행할 수 있는 인물로 보지 않아 그를 당장 처분하지 않고 처소로 돌려보내 반성하게 내버려뒀다. 그로부터 한 달 뒤, 더 큰일이 벌어졌다. 세자는 뒤주에 갇히기 하루이틀 전, 영조를 죽이려고 칼을 차고 영조가 있는 경희궁 쪽으로 갔다. 선희궁에게 이 소식을 비롯해 그동안 세자의 비행에 대해 전해들은 영조는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역모죄를 이유로 세자를 처벌했다. 그 누구도 세자가 죽게 하는 데 선뜻 나서지 못했기에 영조는 세자를 뒤주에 가두게 된다. 그렇게 여드레 동안 뒤주 속에서 세자는 천천히 죽어갔다.
조선 최고의 비극,‘사도세자 죽음’에 얽힌 권력과 인간의 진실을 밝히다
[권력과 인간]은 사도세자가 태어날 때부터 성장하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그의 죽음 이후 영조의 반응과 정조의 역사 왜곡 과정, 나아가 순조 때 혜경궁이 [한중록]을 집필하는 과정까지 1세기 동안의 역사를 두루 다룬다. 이렇게 폭넓게 궁중사를 소개한 것은 사도세자 죽음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사건의 배경과 경과, 나아가 그에 대한 담론의 변화까지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걸핏하면 주위에 분노를 폭발했던 비정한 임금 영조, 그런 남편에게 소박을 맞아 평생 울화를 가슴에 안고 쓸쓸히 살았던 왕비 정성왕후, 영조의 후견인이지만 때때로 그와 심한 충돌을 빚었던 대비 인원왕후, 신분 때문에 그저 사도세자를 낳은 여자로 만족해야 했던 생모 선희궁. 사도세자와 그들의 역학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사도세자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들의 권력욕, 권모술수, 배신과 절망 그리고 공포를 읽지 못하면 사도세자 죽음의 진실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권력과 인간]은 사도세자 죽음의 진실을 해명하기 위한 작업이지만 그 시대 궁궐로 깊이 들어가 궁중 사람들을 만나는 기회이기도 하다. 정병설 교수는 일차원적인 관점에서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의 갈등만 다룬 것이 아니라 임금, 왕비, 대비, 후궁, 세자, 내관, 내인 등 궁중 사람들의 현실, 꿈, 욕망을 두루 살펴 글이 전개되면서 자연스럽게 독자가 입체적으로 사건에 접근하게끔 돕는다. 이 같은 접근은 사도세자의 죽음이라는 사건의 실체를 더욱 적확하고 객관적으로 읽게 했고, 때로는 권력 이면에 숨겨진 인간의 모습까지 드러냈다.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사도세자 사망 250주기, 다시 쓰는 묘지명
2012년은 사도세자가 죽은 지 250년이 되는 해다. 사도세자의 죽음을 세자의 시각에서도 보아야 하겠지만 그것을 넘어서서도 볼 필요가 있다. 그동안 사도세자는 ‘불쌍한 사도세자’ 또는 ‘미치광이 세자’였을 뿐 누구도 그의 죽음을 제대로 신원해주지 못했다. 250년이 지난 오늘에서야 우리는 비로소 [권력과 인간]을 통해 사도세자의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조선이 다시 한 번 기강을 잡는 시기이자 실학의 융성으로 조선의 르네상스라 칭할 수 있었던 영정조 시대. 영조와 정조는 자기 주변 사람에게는 물론 자기 자신에게도 매우 엄격했다. 사치를 멀리하고 소박한 삶을 추구했으며 누구보다 성실했다. 어쩌면 그토록 냉정하고 엄격했기에 최상의 통치가 이루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조와 정조라는 빛 뒤에는 사도세자라는 그림자가 있었다. 이 그림자를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서 영정조 시대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사도세자 죽음의 이면을 읽어가다보면 과연 우리가 그동안 알던 성군 영조와 개혁군주 정조가 맞는지 자꾸만 의문을 갖게 된다. 그렇게 조금씩 알게되는 영정조 시대의 ‘불편한 진실’. [권력과 인간]을 통해 만나는 조선의 어둠은 불편하고 아프다. 권력을 위해 서로 이전투구를 하고, 권력 앞에서는 부모도, 자식도, 형제도 없다. 아버지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이고, 아버지 사도세자를 잃은 아들 정조는 아버지를 신원하기 위해 사실을 교묘히 편집해 아버지상을 새로이 만들어낸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진실은 조금씩 왜곡된다. [권력과 인간] 속 비정한 세계를 읽어가다보면 가슴 한 켠이 답답해진다. “내가 권력이 되고 권력이 내가 되는” 상황, “원래 자기에게 주어진 것이니 오로지 자기만이 가질 자격이 있다는 식”의 비약. 떠날 때를 알지 못하고 권력에 집착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면 그 고위(孤危)함에 마음이 절로 무거워진다. 하지만 이렇게 권력을 통해 인간을 읽는 과정을 통해 독자는 인간을 더 깊이 있게 이해하게 되며, 나아가 더 밝은 역사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시대를 넘어 18세기 궁중사를 읽어야 하는 의의를 여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출판사 서평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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