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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ey talks

구매 버튼을 눌러라.

by Azzurro 2012. 5. 23.

 

 

 

 

                                                                                                        (사진은 flickr.com에서)

 

 

가계 대출 연체율이 심상치 않다.

7일 금융감독원은 3월 말 기준 시중은행의 가계대출 연체율이 0.71%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2007년 3월(0.71%) 이후 최고치이며, 작년 말(0.60%)에 비해 0.1% 포인트 이상 오른 것이다.

상위소득자조차 10명 중 8명이 빚을 끌어안고 사는 지금, 연체율이 상승 추세로 돌아섰다는 것은

향후 채무 불이행자가 늘어날 것임을 의미한다.

연체자와 채무 불이행자에 대한 사회적 시선은 여전히 부정적이다.

 

채무자 책임, 즉 갚을 수 있을 만큼 빌려야 한다는 생각이 도덕 및 윤리기준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갚을 수 있을 만큼이란 도대체 어느 정도를 말하는 것일까.

현재 연체를 하지 않고 있다는 것만으로 합격점을 줄 수 있을까? 아니면 빚이 있지만

월급날 이자를 결제할 수 있는 상태, 혹은 원금과 이자를 힘겹게 납입하고 있는 상태는 괜찮은 것인가?

빚이 아예 없는 상태라면 가혹한 채권 회수 시스템으로부터 과연 영구적으로 자유로운 것일까?

연체를 하고 있지는 않으나 매월 카드 값과 부채이자를 내고 남은 돈에

한숨짓는 우울한 월급쟁이가 흔하다.

신용카드 사용이 일상이 된 지금 소비가 소득의 함수가 아니라 신용의 함수로 바뀐 지 오래다.

즉 소득 수준만큼 소비가 결정나는 것이 아니라 신용카드의 한도만큼 소비 수준을 결정하는 것이

일반적인 세태가 된 것이다.

 

 

 

당신은 지금 빚과 무관하게 살고 있나

 

 

소득은 이제 사람들의 삶의 가치를 만드는 데 중요한 기반으로서의 의미보다 이미 저지른

소비에 따른 카드 청구액을 결제하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당연히 소득이 중단된다는 것은 삶의 가치를 잠시 조정하는 수준이 아니라 빚을 갚지 못하는

연체자가 될 것이란 두려움으로 밀어넣는 일이다.

소득이 갑자기 중단될 수도 있다는 사실 앞에서 공포심을 느끼지 않을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니 많은 직장인들 혹은 그의 가족들이 직장을 잃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 앞에서 '절대' 그런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선을 긋는다.

 

다만 그런 일이 일어날 경우 조금 어려워지는 것이 아니라 최악이기 때문에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음을 인지하고 사는 것은 사람을 초조하고

불안하게 만든다.

그만큼 현재 대출 계약서에 사인한 경험이 없다고 해도, 당장 이자 납입에 문제가 없어도,

원금과 이자를 갚고 있다고 해도 모두가 어떤 외부 악재가 현실화될 때 그래도 1년 이상은

버틸 수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독일의 저항 목사 마틴 니뮐러의 시 '그들이 왔다'를 읽어보자.

 

처음에 그들은 공산주의자를 잡으러 왔다.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므로

그들은 유대인을 잡으러 왔다.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므로

그들은 노동조합원을 잡으러 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므로

그들은 천주교인을 잡으러 왔다.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개신교인이었으므로

그들은 나를 잡으러 왔다.

그런데 이제 말해줄 사람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상당수의 사람들이 어떤 불행이 자신만 비껴가기를 간절히 바라며,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 때문에 아슬아슬한 기분으로 살아간다.

결국 마틴 니뮐러의 시처럼 가혹한

채권 회수 시스템은 당신을 잡으러 오지 않았다.

그러니 그 가혹함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언제 어느 때 당신을 잡으러 올지 모른다는 초조함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혹은 지금 당장 빚이 없다 하더라도 앞으로 절대 빚과 무관하게 살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없다.

갑작스런 재정적 곤란이 발생해 당신을 순식간에 과다 채무자로 만들고 연체의 그물에

걸리지 않기 위해 아슬아슬한 삶을 살게 만들더니 이내 연체자 대열로 밀어넣을 수 있다.

그리고 채권 추심의 가혹함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순간 '그들이 왔다'는

마지막 싯구절에 공감하게 될 것이다.

 

 

 

대중들을 소비 중독 상태로 만들어 버린 기업 마케팅

 

 

게다가 이미 우리의 이성은 기업들의 소비 자극과 머뭇거릴 틈 없이 결제하게 만드는

신용카드의 마력에 포위되어 있다. 신용카드 한도가 바닥나면 다른 신용카드를 추가로

사용하면 되고 결제일만 달리 조정하면 얼마든지 돌려서 사용할 수 있다.

카드 돌려 결제가 결제일을 피곤하게 만들면 마이너스 통장을 활용하면 되고 그조차

바닥나 버리면 저축은행 혹은 카드사를 통해 약간 높은 금리의 장기 대출로 결제 부담을

해소하면 된다.

내집이 없어도 전세계약서 혹은 자동차 등록증으로도 대출을 위한 담보가 가능하다.

 

여기저기 돈 빌려주겠다는 세상에서 살다 보니 당장 주택 담보 모기지 대출을 이자만 갚고

있는 상황(현재 가계 부채 70%가 이자만 납입 중)에서도 마이너스 통장을 사용하게 되는 것

아닌가.

모기지 대출 원금을 갚아야 한다는 부담으로 소비 생활 전체에 각성 수준이 높아져야 정상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빚에 한숨 짓다가도 주말이면 어김없이 가족과 함께 차를 끌고

대형마트에 가서 꽉찬 냉장고를 잊은 채 카트에 식재료들을 채워 넣는다.

 

등산을 한 번 하더라도, 등산화는 기본이고 아웃도어 의류제품과 모자, 스틱과 배낭 및

온갖 액세서리들을 브랜드 제품으로 구매해야 산에 오른다.

물론 이는 엄연히 그렇게 소비를 하는 개별 소비자를 나무랄 일이 아니다.

빚으로 인해 형성된 각성이 기업들의 치명적인 유혹에 무장해제되어

버리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신용카드를 그었을 뿐이다.

 

기업들은 이제 쇼핑을 게임으로 설계하면서 다수 대중들을 소비 중독 상태로 만드는 능력까지

발휘하고 있다. 게임을 하게 되면 우리의 뇌에서는 쾌감 신경전달 물질인 도파민 분비가 늘어난다.

기업들이 쇼핑을 게임으로 설계한다는 이야기는 결국 기업들이 소비자들을 의도적으로 소비중독으로

몰고가려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독성은 뇌의 생리학적 반응으로 우리의 이성이 쉽게 통제하고

방어하기 어렵다.

 

마틴 린드스트롬의 <누가 내 지갑을 조종하는가>라는 저서는 이 중독성의 위험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쇼핑 중독, 그리고 그 밖에 다른 모든 중독들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다시 한번 도파민으로 돌아간다.

대뇌변연계에서 분비되는 도파민은 '감정 상승'과 '쾌감'을 불러일으키는 신경전달물질로서

도로 정상 수치로 떨어지는 순간 우리는 도파민 분비를 자극했던 특정 행동을 반복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 대상이 담배나 술이든, 혹은 마약이든 아니면 새로 나온 마놀로 블라닉 구두이든 간에

중독을 유발하는 행동이나 물건을 반복해서 경험할 수록 우리 몸에는 강한 내성이 생긴다.

이 말은 예전과 같은 감정 상승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점점 더 많은 행동과 물건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 마틴 린드스트롬 <누가 내 지갑을 조종하는가>

 

냉장고 속 유통기한 지난 음식들을 뒤로 하고 주말이면 어김없이 대형마트를 찾는 행위도

일종의 중독성과 관련있을 것으로 보인다.

할인제품을 사지 않으면 불안하고 신용카드를 통해 포인트를 누적시켜 물건을 구매하지 않으면

왠지 손해보는 기분에 휩싸이는 것도 일종의 중독성이다.

지갑에 신용카드가 들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외출을 했을 때 느끼는 불안도 아마 신용카드에

우리가 중독되어 가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사진은 flickr.com에서)

 

 

놀라운 기업의 마케팅, 소름이 끼친다

   


결국 당장의 채무로 인해 소비 생활 전반에 대해 긴장해야 하고 가계의 긴축 재정이 필요 함에도

지갑에서 신용카드를 꺼내 자르지 못하고 또 다시 차를 끌고 대형마트로 향하는 사람들은 소비 중독,

신용카드 중독에 어느 정도 감염되어 있다고 봐야 한다. 뇌의 신경 전달 물질을 왜곡시킬 정도의

마케팅 광고가 우리를 끊임없이 자극하기 때문이다. 갚을 수 있을 만큼 돈을 빌리고 성실히 상환하기 위해

자신의 재정 상황을 통제하고 사는 사람들이 드문 것은 개별 소비자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를 치명적으로 자극하는 좀 더 확실한 이야기도 있다.

 

'현재는 인지과학의 패러다임이 신경과학과 맞물려 새로운 마케팅 트렌드가 형성되고 있다.

이른바 '뇌의 구매 버튼을 직접 누르게 한다'는 '뉴로 마케팅 neuro marketing'의 등장이 그것이다.

'뉴로 마케팅'은 광고의 효과를 직접 마음의 자리인 뇌에서 관찰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현재는 인지과학의연구 도구 중 하나인 MRI나 PET 등의 뇌 영상 장치(조영술)를 활용해

뇌를 관찰하여 직접 물품이나 브랜드에 대한 호감도를 확인하기도 한다.'

- 이남석 <마음의 비밀을 밝히는 마음의 과학> 중

 

 

뇌의 구매 버튼을 직접 누르게 한다. 이 얼마나 무서운 과학의 진보인가.

뇌의 변화를 관찰해 물품이나 브랜드 호감도를 판단한 후 제품이 공급되고 있다는

놀라운 기업의 마케팅이 소름끼친다.

이렇게 우리의 욕구와 무의식을 자극해 자신도 모르게 지갑을 열어 신용카드를 꺼내들게 만드는 사이

자신의 신용을 갚을 수 있을 만큼 적절히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기업들의 마케팅이 이렇게 치밀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알고 늘 의심하며 사는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뇌에서 보내는 신호에 따라 쇼핑카트를 채우는 자신이 조종당하고 있다고 생각할 이는 없다.

 

한 달 후 신용카드 청구서를 보고나서야, 카드 결제금이 주택 담보 대출 이자를 납입하기 위해

마이너스 통장에 손을 대야 할 만큼 초과되었다며 자신을 비난할지언정 당장은 스스로 원해서

물건을 집어들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언론과 정부 정책, 금융의 온갖 마케팅을 통해 빚에 대해 무장해제 된 상태에서

기업의 무의식 조작까지 우리를 빚의 그물에 갇히게 만들고 있다.

과연 이렇게 완벽한 빚 프로젝트에 자유로운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갚을 만큼 빌려써야 한다는 말은 이미 실행 불가능한 격언에 지나지 않을 세상에 살고 있다.

신용불량 상태에 빠진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혀를 차고 있는 사람의 지갑에도 신용카드가

여러 장 들어있는 것이다.

그의 월급날도 카드 결제금으로부터 그리 안전하지 않을 것이다.

 

빚을 갚지 못하는 사람에게 향했던 비난의 손가락을 거둬들여야 할 때이다.

진부한 표현 대로 나머지 네 개의 손가락이 분명 나 자신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마이뉴스 기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