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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 Mash up

모든 고정된 것들이 연기처럼 사라진다.

by Azzurro 2015. 3. 25.

자산과 규모로 막대한 이익을 본 산업시대의
자산덩어리 기업들은
지금 개인단위 프로젝트 업체로
해체하지 않으면 안타깝지만
기회공유의 파도에 모두 휩쓸려 사라질 것이다.
*비빔 박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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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은 '용법’이다.

자신을 망치는 상대한테 늘 끌리는 이들이 있다. 항상 상처를 받으면서도 또다시 그런 대상을 만나곤 한다. 신기한 노릇이다. 불교에선 이것을 업이라고 한다.태어날 때부터 이미 신체에 깊이 새겨진 기억이라는 뜻이다. 사람은 백지 상태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선천의 기억을 몸에 새기고 태어난다. 명리학적으로 사주팔자가 여기에 해당한다.
명리학적 앎의 체계에 따르면, 몸, 더 구체적으로는 오장육부 혹은 경락의 배치가 신체적 리듬과 강도를 결정하고, 그것이 곧 운명의 궤도를 결정한다고 본다. 다시 말해서, 모든 존재는 천지의 기운을 받아 태어 나는데, 그것이 가장 먼저 오장육부와 경락의 배치를 만들고, 또 그것이 성격과 행위의 관점을 만들고, 그에 따라 가족적·사회적 배치가 형성된다. 그리고 그것의 시공간적 구조를 우리는 팔자 혹은 운명이라고 부른다. 요즘 도심을 지나가다 보면 온통 사주카페에 점성술 텐트들이 즐비하다. 한편으론 실업의 심각성을 보여 주는 것이자, 다른 한편 현대인들이 자신의 운명에 얼마나 목말라 있는지를 말해 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커다란 운명적 비전도 아니고, 고작 사귄지 한두달 된 애인과의 관계, 혹은 자식의 진학문제 따위를 상담하기 위해 점쟁이를 찾아간다. 모든 관계가 한치 앞을 재기 어려운 상황인 셈이다. '모든 고정된 것이 연기처럼 사라진다!" 는 맑스의 전언은 근대가 중세적 가치를 전방위적으로 해체할 때 나온 말이지만, 이 말은 바로 우리시대를 더할나위 없이 잘 표현해 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자본주의가 고도화될수록 앞으로 점성술은 더욱 만개하게 될 것이다.
헌데, 문제는 점성술이 번성할수록 사람들은 점점 더 운명으로 부터 소외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단적으로 말해, 점쟁이한테 길흉화복을 묻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 일어날 일은 어차피 일어날 것이고, 일어나지 않을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걸 족집게처럼 알아맞히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점이 무슨 묘기대행진도 아니고, 중요한 건 내가 나의 운명에 어떻게 개입할 수 있는가이다. 그러기 위해선 간절히 발원하는 바가 있어야 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발원한다는 건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의 지도를 재배치하겠다는(불교식으론 업장을 소멸시키겠다는) 실존적 결단을 의미한다 그때 명리학적 지혜가 필요하다.
내가 본래 가지고 태어난 카드를 통찰함으로써 어떤 패를 버리고, 어떤 패들 꺼내들 것인지를 선택할 수있는 까닭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운명을 바꾸는 것도 아주 간단하다. 리듬과 강도 부분에서 예고했듯이, 몸에 새겨진 기운의 배치를 바꾸면 된다. 없는 기운을 만들어 낼 수는 없지만, 내가 태어날 때 타고난 기운들은 얼마든지 활용가능하다. 그것을 어떻게 조합하느냐, 어떤 식으로 차서를 정하느냐에 따라 내 운명의 궤적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헷갈리면 화투나 카드 게임을 연상하면 된다), 출가자들이 수행을 하는 것도 이 신체에 새겨진 지도로부터 벗어나기 위함이리라. 그런 점에서 업장을 털어 내면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도 아주 간단한 이치다. 사주팔자의 흐름이 지닌 관성들로부터 자유로워지면 그게 곧 깨달음이 된다. 한비야식으로 말하면,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이렇게 말하면 다들 포기해 버린다. 그냥 팔자대로 살지 뭐, 맞다. 모두가 다 수행자가 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그럼 그냥 무데뽀로 살아야 하나? 점쟁이들이나 찾아다니면서? 그렇지는 않다. 팔자를 완전히 벗어날 수야 없겠지만, 적어도 팔자 안에서 자유의 공간을 확보할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 이것까지 포기하면, 그건 정말 부처님도 어찌할 수 없다는 구제불능의 신세가 되어 버린다. 예컨대, 앞에서 말한 것처럼 계속 자신을 망치는상대한테 끌리는 팔자를 타고났다고 치자. 두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평소에 자신의 욕망의 배치를 바꿀 수 있는 일상적 훈련을 하는 것이다. 즉, 재능·건강·재물 등 자신이 현재 가지고 있는 것들을 지금 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쓰면 된다. 그렇게 기운의 배치를 바꾸면 자신의 몸에 새겨진 욕망의 코드에 변화가 생기게 마련이다.
-------------(중략)-----------
다른 하나는 자신의 그런 사나운 운명에 대해 능동적으로 수긍해 버리면 된다. 능동적으로 수긍한다? 무슨 말인고 하니, 피할 수 없다면 그 상황을 적극 즐겨 버리라는 것이다. 대신, 그 무쌍한 변화 자체를 통찰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이 번뇌가 되는 건 많은 경우 사회적 통념으로 인해서이다. 만약 내가 이 가치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면(이게 바로 공부다!) 아무리 엇나가는 팔자라 해도 그것이 나의 존재성에 해를 입힐 수가 없다.
"팔자가 사납다"고 하는 건 대개가 돈과 권력, 가족 등의 척도에서 많이 빗나갔다는 뜻이다. 하지만, 만약 내가 그런 가치에서 자유롭다면 상대가 어떻든(심지어 바람둥이라 해도)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니체의 말대로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도 창조한다고 했는데, 내가 그 대상을 전혀 다른 존재로 창조해 버리면 되는 것 아닌가?
(고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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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기회공유(필자인 박선생이 만든 조어)의
시대(공유경제사회 관련해서는 제러미 리프킨의 저서 참조)가 도래해 기존의 자본계급주의가 붕괴되면 강박증처럼 본인의 앞날 일까지 점술가에게 의탁해 알아보려는 점술상담은 많이 사라질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의 자본계급주의 시스템 안에서 많은 사람들을 특히, 정신적으로 고통스럽고 불안하게 만들었던 갖가지 요소들이 공유경제사회에서는 생성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견고한 것들은 새로운 바람에
먼지처럼 사라진다.'

*비빔 박선생